비텐베르크 이야기는 역시 "루터의 집(Lutherhaus)"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루터의 집은 비텐베르크를 찾는 관광객들이 - 성교회(城敎會, Schlosskirche)와 함께 - 절대 놓치지 않고 찾는 곳이고, 어쩌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비텐베르크 관광의 알파요, 오메가인 곳이 바로 루터의 집이다. 루터의 집은 옛날 수도원 자리였던 관계로 건물 자체가 4층 규모의 아주 큰 건물이다. 뿐만 아니라 내부는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전시물 등의 볼거리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루터의 집을 제대로 보려면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루터의 집을 찾을 것이 요구된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루터의 떡갈나무까지 찾아가 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루터의 집을 돌아보기에는 2시간이 오히려 한없이 짧다.
자, 이제 루터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하겠다. 아래 사진은 루터의 떡갈나무를 보고 난 후 루터의 집을 찾아가며 찍은 사진인데, 맨 앞에 보이는 건물부터 비텐베르크 시내의 메인도로인 콜레기엔거리(Kollegienstraße)가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건물 뒤쪽에 바로 루터의 집이 있다.
콜레기엔거리를 따라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루터의 집을 알리는 커다란 입간판과 마주치게 되는데, 입간판에는 "마틴 루터의 삶과 그의 업적,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미친 영향"이라고 쓰여 있다. 아, 개관시간도도 쓰여 있는데, 그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4월부터 10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일 개관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찾는 이가 적은 11월부터 3월까지는 월요일에 휴관하며, 개방시간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조금 짧아진다.
루터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에 두 개의 안내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하나는 지금부터 우리가 볼 루터의 집안내판이고, 다른 하나는 아우구스테움(Augusteum) 안내판이다. 아, 아우구스테움은 옛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자리에 세워진 루터기념관을 말하는데, 이 수도원 건물은 처음에는 대학건물로 쓰이다가 18세기부터 루터교 신학교건물로 쓰였었다.
아, 아우구스테움이란 말은 원래는 고대 로마에서 제국을 숭배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아우구스테움이란 말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본떠 지어진 것이다.
루터의 집은 'ㅁ자' 형태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콜레기엔거리 쪽에 있는 외벽 중간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문안에 들어서면 전면에 루터의 집이 보인다.
ㅁ자 형태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루터의 집에는 외벽으로 둘러싸인 내원(內園)이 있는데, 그 중앙에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루터의 집은 원래는 수도원이었는바, 이 수도원은 1504년부터 1517년에 걸쳐서 축조되었다. 이 수도원은 아우구스티너 종단(의 수도사)에 속해있었다. 루터는 1518년에 이 수도원에 수도사로 왔으며, 이 수도원은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1522년에 해체되었다... (이하 생략)."라고 쓰여 있다.
안내판 옆으로 보이는 동상은 루터의 아내인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22)의 동상이다.
보라의 동상을 지나치면 전면에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루터의 집이다. 집 앞에 보이는 이정표에는 왼쪽으로 가면 아우구스테움이, 오른쪽으로 가면 루터의 집 (입구)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루터의 집 중앙에 보이는 부조인데, 부조에는 "1508년부터 1546년까지 이곳에서 루터가 살았고, 활발하게 활동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아래 사진 속의 건물이 루터의 집의 출입구에 해당하는데, 건물 위에 아래까지 드리워진 현수막에는 "마틴 루터의 삶과 그의 업적,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미친 영향"이라고 쓰여있다.
루터의 집을 둘러보려면 위 사진의 문을 들어가서 왼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아래 사진 참조)을 구입하여야 하는데, 멜란히톤의 집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입장권의 가격은 8유로이다.
매표소 옆에 상설 특별전시회가 열리는 2층(우리식으로 생각하면 3층)은 2023년 6월 현재 닫혀 있다는 비보가 적혀 있다.
매표소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의 공간에 루터의 집의 입체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루터의 집은 보다시피 4층짜리 건물이다.
그리고 비텐베르크 시내를 축약해서 만들어 놓은 전시물이 있는데, 비텐베르크 시내를 관통하는 콜레기엔거리에 있는 4개의 건물의 입체모형이 만들어져 있다. 비텐베르크 시내의 많은 건물 중 유독 이 4개 건물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이들 4개의 건물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거리에 4개의 세계유산이 있는 경우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아, 그리고 보다시피 해당 건물의 이름이 적혀 있는 버튼을 누르면 그 건물에 밝은 빛이 들어온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루터의 집안으로 들어가서 전시물을 한 번 둘러보도록 하겠다. 루터의 집에는 그림을 포함한 각종 전사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내 스스로 일일이 전시물의 사진을 찍었건만 이들 전시물들이 어디(몇 층)에 있었는지는 사실상 전혀 기억에 없다.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주로 전시물 자체에 대한 설명 위주로 글을 써 내려가도록 하겠다. 그러하니 전시물의 위치에 관한 것은 카메라에 남아 있는 사진의 순서와 지극히 어렴풋한 기억의 끈을 조심스럽게 매치시켜 가면서 하는 이야기일 뿐, 그리 신뢰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밝혀 둔다.
일단 루터의 집 내부의 전시실에 들어서게 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그림은 이것이다. 사람 키보다 높은 그림으로 널찍한 공간의 벽면 전체에 이 그림 하나만 달랑 전시되어 있다. 아쉽게도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설명을 찍어 놓지 않아서 그림에 관한 정보(작가와 제작연도 등)는 전혀 알 수 없다.
그에 이어지는 방 역시 넓은 공간에 의자들만 그득하고 전시물이라곤 전면에 보이는 그림 하나가 전부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을 그림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크라나하(Lucas Kranach, 1472~1551)의 1516년 작인데, 중세까지만 해도 문자를 해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이처럼 그림을 많이 활용하였다고 한다.
그림 옆에 그림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 그림은 그에 따르면 1516년에 크라나하가 시의회로부터 구 시청사에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화면에 계명을 따르는 것과 계명을 어기는 것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인데, 선인과 악인의 모습을 한 천사와 마귀가 그와 같은 설명을 해주고 있다.
아, 루터의 집에서 대여해 주는 오디오가이드를 활용하면, 그림에 관한 아주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사진 오른쪽 상단에 107이란 숫자에서 보듯이 루터의 집은 전시물로 그득하다.
십계명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을 뒤로하고 바라본 이방의 모습.
이것은 루터가 설교할 때 사용했던 설교단(Luthers Kanzel)으로 보리수와 떡갈나무로 만들어졌다. 설교단 위에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한 사람은 마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요한이라고 한다.
루터의 설교단에 관한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있다. "루터는 1511년에 비텐베르크 수도원에서 설교를 시작했고, 적어도 1514년부터는 성 마리엔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설교를 할 때 설교단을 사용했다. 지칠 줄 모르는 목회자였던 루터는 많은 날들을 하루에 3번 심지어 4번씩이나 설교를 했으며, 설교 횟수는 2000번을 넘어섰다. 그의 감동적인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개혁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루터의 관에 붙어 있던 손잡이인데, 루터가 1546년에 사망했으니 당연히 15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재질은 보다시피 철(Fe)이고, 제조방법은 단조.
루터의 관 손잡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개축이 행해지고 있던 1892년 2월 14일에 룀힐트(Römhild)와 또 한 명의 엔지니어가 1885년에 발해진 황제의 명을 어기고 루터의 무덤을 열었고, 약 7피트 정도의 깊이에 묻혀 있던 루터의 관과 만나게 되었다. 루터의 관이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종교개혁가 루터의 유골을 볼 수 있었다. 이때 관에서 분리되어 있는 손잡이가 회수되었고, 그 손잡이는 1913년 5월 16일에 루터의 집에 기증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루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나무에 오일로 그려진 17세기의 작품이다(작가는 미상).
이 그림에 대해서도 아래 사진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기는 한데,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이 그림과는 관계가 없어서 설명은 생략한다.
지금까지 본 2점의 그림, 루터의 설교단, 루터의 관 손잡이, 그리고 죽은 루터의 모습을 담은 그림 등의 전시물을 보고 나면 아래 사진과 같은 계단을 통하여 1층(우리 개념으로 말하면 2층)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지금부터는 1층의 전시물 중 내가 주의 깊게 보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먼저 이것은 '교황의 파문칙령을 불태우는 루터(1834년작, 캔버스에 오일)'이다. 잘 알다시피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조목조목 반대하는 95개조의 글을 비텐베르크의 성교회에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의 불꽃을 당겼는데, 이를 이유로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하는 칙령을 발한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이 파문칙령을 불태워버리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앞의 글 "루터의 떡갈나무"편에서 이미 상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아래의 그림은 각종 루터의 초상화 가운데 우리가 가장 자주 많이 만나는 초상화인 '수도복(Kutte)을 입고 있는 루터'이다. 여기서 Kutte는 특히 소매와 옷자락이 길고 두건이 달린 것을 말하는데, 그림 속의 Kutte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건 1517년에 영주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또한 크라나하의 작품인데, 나무 위에 오일로 그린 1520년 그림이다. 아, 이 그림은 훗날 캔버스 위로 옮겨졌다.
루터의 초상화 옆에 있는 그림은 루터의 부인인 '보라'의 초상화인데, 이 그림에 대한 설명 부분을 사진으로 남겨 놓지 못해 더 이상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아래의 것은 일단 그 화려함으로 인하여 이것이 전시되어 있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을 확 잡아 끈 것이었는데, (특히 학술적) 논쟁이 행해지던 강단이다. 맨 밑단은 당시 대학의 4개 학부, 즉 철학, 법학, 의학 그리고 신학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라고 한다.
강단이 전시되어 있는 방 전체의 모습인데,
앵글을 조금 달리하면 벽 전체를 이름 모를 사람들의 초상화가 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강단을 등 뒤에 두고 반대편의 벽을 바라본 모습이다.
이어서 위 사진 속의 화려한 방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루터의 방(Lutherstube)이 나타난다. 옛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인데, 개인적으로는 화려함보다는 이런 공간에서 맛볼 수 있는 세월의 흔적에 훨씬 더 매력을 느낀다.
루터의 방에 대하여는 자세한 안내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터의 방은 루터가 그의 친구, 동료들과 함께 그 유명한 "탁상 대화(Tischgespräch)"를 진행한 방이다.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에, 사람들은 이곳에 둥근 원을 이루어 모였고, 참가자들은 후세 사람들을 위해 그 자리에서 오간 말들을 기록했다.
이 방은 1535년부터 1538년에 걸쳐 이러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벽의 패널, 바닥, 책상, 상자의 시트, 의자 등은 모두 당시부터 있었던 오리지널이다. 아, 난로는 1602년에 설치되었고, 그림들은 1602년과 1630년에 그려졌다.
1655년부터 이 방은 루터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방문객들은 벽에 분필로 쓴 글씨를 남겼다. 그러한 글씨들의 대부분은 19세기에 제거되었지만, 1712년에 비텐베르크를 방문했던 러시아 황제 피터 대제(Peter Große)의 이름은 서쪽 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위의 설명을 고려하면 결국 우리가 지금 루터의 방에서 보는 이 책상이 루터가 그 유명한 탁상대화를 이끌어가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1530년대에 만들어진 이 책상은 500년째 옛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한편 루터의 방은 2016/2017년에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크뤼거(Krüger) 교수와 루돌프 아우구스트 오에트커(Rudolf-August Oetker) 재단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루터의 방을 지나치면 또다시 현대적인 모습이 이어지는데, 특히 이 방은 그 현대화가 가장 심각하게 진행된 곳으로, 이곳에서 루터와 루터의 집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검색을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종교개혁이란 사건은 서양사에 있어 역사 구분의 한 획을 긋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때문에 세계 각국, 특히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종교개혁이란 사건을 기념하는 각종의 기념주화를 주조하였는데, 루터의 집에는 그런 기념주화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재료와 크기는 물론이고, 제조국가와 주조 연도 또한 상이하다. 무엇보다 기념하는 구체적인 내용 또한 제각각인데, 이들 전시물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루터의 집이 한때 대학건물로도 사용되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도서관쯤으로 생각되는 공간이 있는데, 아예 유리창으로 가로막아 놓아서 접근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즉,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도서관쯤에 해당하는 넓은 공간이 모두 유리벽안에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가가이에서 보지 못하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사진으로만 보아도 아래 사진들 속의 책이나 탁자는 모두 보존에 신경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다.
이제 다시 몇 장의 그림들을 더 감상해 보기로 하겠다. 아래에 소개하는 두 점의 그림은 종교개혁의 진행과정을 조금만 알면 제목만으로도 그림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우선 이것은 "루터의 95개조의 반박문"으로, 1878년에 율리우스 휘프너(Julius Hübner, 1806~1872)라는 화가가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다. 그렇다면 그림 뒤편의 문이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문이라는 이야기인데, 루터가 반박문을 내걸 당시에 성교회의 문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림상으로도 재질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은 "파문칙령을 불태우는 루터"인데, 1834년작으로 캔버스에 유화이다.
아, 이 그림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루터가 보름스(Worms) 제국회의에 나타나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의 심문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플뤼더만이란 화가의 1864년 작품(캔버스에 유화)인데, 보름스 제국회의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보름스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출구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다 보면 각종 흉상이나 초상화 등을 모아놓은 방과 만나게 되는데, 이 가운데 루터의 데스마스크만 사진으로 남겨 둔다. 독일의 경우 루터의 집의 경우처럼 "~의 집"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 곳을 가 보게 되면 거의 예외 없이 그 집의 주인공인 사람의 데스마스크가 있던데, 당시에 유명한 사람이 사망하면 데스마스크를 만들어 두는 것이 이들의 문화였나 보다.
어떤 곳에 전시되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것으로 루터의 Humpen이 있는데, 루터가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아, Humpen이란 손잡이가 달린 큰 (술)잔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표현을 빌자면 머그잔 정도에 해당한다.
이 Humpen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세기 초반, 즉 루터가 사용하던 때는 나무로 되어 있었으나, 1694년에 루터의 숭배자들이 머리 부분을 은으로 장식했다. 뚜껑에는 "하나님의 말씀: 루터의 가르침은 지금도, 또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루터의 집 곳곳에서 우리는 루터가 남긴 말들과 만날 수 있는데, 루터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그의 말 가운데 내가 끌렸던 말들을 소개해 본다.
"나는 Käthe를 프랑스와도, 또 베네치아와도 바꾸지 않겠다." 아, Käthe는 Katharina의 애칭인데, 여기서 Katharina는 물론 그의 아내 Katharina von Bora를 말한다. 루터가 1531년에 남긴 말인데, 루터가 결혼한 것이 1525년이니 결혼 후 6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여전했던 것을 잘 보여주는 말...
"다른 사람이 내 짐을 들어주면, 그의 힘이 곧 나의 힘이 된다."라는 이 말은 루터가 1520년에 한 말이다. 1520년이면 1517년에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성교회에 내건 후 가톨릭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던 힘든 시절인데, 당시에 루터가 처한 상황 그리고 그의 마음을 절로 떠 울리게 만드는 말이다.
이 말은 종교개혁이 과정에서 언제나 루터를 뒷받침해 주었던 동반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과 루터의 초상화 밑에 적혀 있는데, 반드시 그들의 관계에 국한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기도 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일반화시켜도 될 듯하다는 이야기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상설전시가 행해지는 3층은 아쉽게도 2023년 6월 현재 개축으로 인해 닫혀 있다.
이것으로 루터의 집 내부공간 및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에 관한 이야기는 끝맺도록 하겠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루터의 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우선 루터의 집을 위하여 기부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기부금함을 만나야 하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그냥 지나쳐도 좋다. 나 또한 그러했는데,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를 위하여 기부할 생각은 아직까지 가져본 적이 없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의 관문이 더 남아 있다. 관람을 마치고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면 저절로, 가히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노천카페가 그것인데, 루터의 집을 둘러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이 카페를 보는 순간 떠오르는 차 한잔의 유혹은 감내하기 힘든 수준이다.
비텐베르크에서의 점심을 루터의 집 옆에 있는 (루터호텔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von Bora에서 하려고 찾아갔다. 입구에 쓰여있는 "맛있는 식사는 영혼에 있어 발삼(Balsam) 향과 같은 것이다"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문 앞에 섰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런,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는단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했던 INDEPENDENT라는 허름한 레스토랑을 내가 찾아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