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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Nov 11. 2023

빗속의 화합

그렇게 웃자

행운권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파트 정문 진입로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어 몇 미터 앞에 자리 잡은 어린이집과 그 맞은편 지하 1층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무대 밑 왼쪽부터 상품으로 준비된 공기청정기, 수건건조기, 스팀오븐, 전기포트, 토스트기, 프라이팬, 에어 프라이기, 와플메이커, 중식도 칼세트, 헤어드라이기, 쌀, 샤인머스캣, 라면 등 보기에도 탐나는 가전제품들이 나란히 정렬된 채 누군가의 손에 의해 pick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성 사회자는 무대 위 파라솔 안에서 행사의 순서를 복기라도 하듯 가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또 무대아래로는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이쁜 옷을 입은 앙증맞은 여자아이가 장기자랑을 앞두고 긴장감을 지우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비가 예보되어 있던 토요일 오후, 역시 같은 날 '입주민화합한마당'이 예정되어 있던 우리 아파트 단지는 이른 새벽에 내린 비가 그치면서 습기를 비집고 반짝 나온 햇살과 그 빛을 머금은 가을하늘의 하얗거나 회색빛이거나 한 구름들로 인해 따사로움마저 느껴졌다.




며칠 전부터 '주민행복지원센터'로부터 조금은 낯선 방송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민화합 행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많이 참석하시어 장기자랑도 하고 행운권 추첨을 통해 상품도 받아가라는  

내용의 방송이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그것도 황금 같은 주말 오후에 다른 스케줄 잡지 말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주민 행사에 참석하라고?' 처음 방송을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그 방송을 듣고 있자니 뭔가에 세뇌라도 된 것처럼 이번 주말엔 다른 일정 잡지 말고 행사에 참석해야 할 것 같은 의무 비슷한 감정이 스멀스멀 마음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남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이번주에 비도 온다는데 주민들이 많이 참석할까?, 하며 괜한 걱정 반 오지랖 반을 떨기도 했다.

어쨌든 딱히 할 일을 만들지 않았던 우리는 '주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또 덤으로 '행운권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약간의 설레발도 더해가며 슬리퍼를 끌고 아직 행사 준비로 한창인 관리사무소 직원들 사이를 어슬렁 거렸다.




행사의 첫 시작은 역시나 초대가수다.

삐까삐까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여가수가 나와 그럴싸한 목소리로 현란한 춤동작과 함께 트로트가요를 불러젖히니 여기저기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고 연신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렇게 몇 명의 초대가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행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주민노래자랑 시간이 다가왔다.

어린 꼬마의 뒤를 이어 이미자 가수님의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로 시작하는 '동백 아가씨'

를 부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쓸쓸한 목소리는 깊어가는 가을을 닮은 듯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위에 조용히 내려앉기도 하다가 약간은 어색한 표정을 한채 무대를 주시하던 사람들의 얼굴에 살포시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참 행사가 진행 중인데 갑자기 회색구름이 하늘을 덮는가 싶더니 요란하게도 비가 쏟아지고 강한 바람이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마구 뒤엉킨다.

그사이 나와 남편은 후다닥 자전거 보관소로 뛰어들어가 비를 피한다.

행사준비위원들은 주민들에게 우의를 돌리고 부리나케 천막을 가지러 우왕좌왕하느라 정신없다.

억세게 쏟아지는 빗속에 행여 주민들이 자리를 뜰까 염려된 진행자는 행운권 추첨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던 우리의 발걸음을 강하게 붙잡는다. 역시 베테랑이다.


장기자랑 신청을 2명 정도 더 받겠다는 소리에 '나도 노래하나 할까?' 농담반 진담반으로 건넨 내 말에 남편은 ' 온 동네에 우세당하지 말고 가만있어' 하며 허공에 뒤척대던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않는다.

이래 봬도 내가 노래는 좀 하는데 그걸 증명할 방법을 남편에게 강제로 제지당한다.




오락가락하던 우중에도 군중심리인지 기대하지 않은 빗속의 당황스러운 즐거움 때문인지 많은 주민들은 자리를 지켰고 우리도 빗속의 향연을 즐기게 되었다.

성시경의 '두 사람'을 성시경만큼이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읊조렸던 306 동의 젊은 아빠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꿋꿋이 노래 한곡을 불렀던 몸이 불편했던 주민도, 한마음으로 그 무대의  방청객이 되어 아마추어 가수들을 응원했던 주민들도, 그날의 한때가 그저 비가 오락가락하던 어느 한 날에 치러졌던 조금은 어설펐던 행사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었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분명 곁눈질로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던 그 순간을 마음속에 담았고 내리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우산도 없이 무대를 마쳤던 주민들의 행복한 얼굴도 눈에 넣었기 때문이다.




처음 입주를 시작하고 우리 아파트에서도 층간소음이나 주차 등의 크고 작은 해프닝이 연신 발생하곤 했다.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공동주택이니만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방법을 모색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일들은 여전한 숙제로 남아있지만 주변의 것 들에 무관심했던 내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주민들을 보며 그네들의 사는 모양새도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리지만 서서히 알아가면서 알 수 없는 유대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한 울타리에 거주하는 같은 공동체이며 가끔은 부딪히고 깨어지지만 그렇게 해서 부스러진 것들을 다듬어가다가 단단한 틀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주민행사가 열렸던 그 하루 동안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고 격려했고 기뻐했다.

누구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있을 때 진정으로 사람다운 우리가 될 수 있음을 그날 나는 조금은 배우고 말았다.


 그날 나는 운이 좋게도 와플기 하나를 행운권 추첨으로 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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