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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멋지기 Jun 16. 2024

밥에 대하여

영화「강변의 무코리타」평론


미국 유학 생활에 마침표가 찍혀 책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음에도 계속 입안에 굴려 녹여먹는 사탕으로 다시 탄생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이유가 하나가 아닌 점에서 그렇지만 그중 가장 큰 몸짓을 자랑하는 것의 이름표에는 '밥'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닌 밥이라니. 누군가는 헛웃음을 지을지 모를 만큼 가벼운 대상인 밥이 누군가에게는 정말 무겁게 자국을 낼 수 있는 법이다.


돌이켜보면 철없는 이십 대 중반 청년의 자조 섞인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매달 다른 유학생에 비해 상당히 적은 생활비를 받아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부모님께 부담이 된다고 느꼈던 것 같다. 혹시라도 돈 관리에 소홀해 생활비가 조기에 떨어지면 당장 식비가 없음에도 절대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대신 나름대로 친분을 유지하던 한국인 유학생 동생들에게 음식 재료를 꾸곤 했다. 달걀 몇 개, 쌀 한 봉지, 소시지 몇 봉. 달걀을 가장 자주 꾸었다. 달걀만 있으면 어떻게든 한 끼는 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버티다 새로운 달이 돌아와 생활비가 송금되면 빌린 재료의 몸집을 키워 한 턱으로 그들에게 돌려줬다. 문제는 이 때문에 다시 월 중반이 지나면 생활비가 다 떨어지고 다시 음식 재료를 꾸러 돌아다니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해소되지 않는 빚과 보은의 연쇄작용은 우라늄 원자의 핵분열과도 같았고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보니 못해도 반년은 지속됐다 기록되어 있다. 


무코리타 연립주택으로 이사 온 주인공 야마다 타케시의 옆집 이웃인 시마다 코조처럼 "나는 돈이 없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면, 식기구만 챙겨 야마다의 집에 쳐들어가 밥을 얻어먹을 용기가 있었다면 그 반년의 모습은 달랐을까. 일 년 이상 집세가 밀렸음에도 비싼 묘석을 판 돈으로 소고기 전골부터 사 먹는 묘석 방문 판매상 미조구치 켄이치의 집으로 쫓아가 달걀부터 깨고 보는 야마다와 시마다처럼 지낼 수 있었을까. 매달 문을 두들겨 멋쩍은 웃음으로 달걀을 꾸러 온 한국에서 온 나이 많은 형에게 쌀쌀맞게 굴지 않고 음식을 베풀었던 그 동생들은 야마다였고 미조구치였고 직접 키운 채소를 품 안 가득 야마다에게 가져다준 시마다였다는 것을 영화「강변의 무코리타」를 보며 새롭게 깨달았다. 


작은 어촌 마을 생선 가공 공장에 취업한 야마다 타케시는 영화 초반부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공장 사장과의 대화에서 뱉은 짧은 대답을 제외하면 직장 동료와도, 새로 입주한 연립주택의 이웃과도 말을 나누지 않는다. 어두운 표정과 다소 움츠린 듯한 어깨가 이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채워줄 뿐이다. 흑백에 가까운 야마다에 색을 가진 생기가 피어나는 순간은 첫 월급으로 사 온 흰 쌀로 갓 지은 밥을 한 입 먹는 그 순간이다. 회사에서 받은 젓갈에 장국 하나만이 전부인 식사이지만 윤기가 흐르고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흰쌀밥에 야마다는 비로소 살아 숨 쉬고, 흰쌀밥을 먹는 행위가 바로 세상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욕실 사용이라는 괴상한 요청으로 등장한 옆집 이웃 시마다 코조와 가까운 관계를 맺어가게 되는 것 또한 식사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시마다가 본인이 재배한 채소를 일부 가져다 줌으로써 등가교환의 식을 일부 구성하긴 하지만 일견 일방적으로 야마다의 밥을 얻어먹고 반찬을 얻어먹는다. 정작 주인인 야마다보다 훨씬 더 많이. 투덜거리는 말과 다르게 야마다는 시마다의 방문을 강하게 거절하지 않는다. 밥을 같이 먹는 행위는 야마다와 시마다에게 각자 잃어버린 것의 빈자리와 남겨진 자의 아픔을 달래는 의식이기 때문일 테다. 추후 본인이 가진 상실 때문에 야마다의 과거에 거부감을 느낀 시마다가 식사 때가 되어도 찾아오지 않자 시마다를 찾아 나서는 야마다의 모습은 그래서 애처로우며 안쓰럽고 동시에 회복의 과정에 접어든 야마다를 볼 수 있어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영화「강변의 무코리타」의 다양한 신scene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코 식사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대사가 오고 가는 장면 또한 식사 시간에 등장한다. 야마다와 시마다의 식사 시간은 몇 번에 걸쳐 그려지며 짧은 시간 동안 둘은 서로에 대해 더 다가가게 된다. 집 주인 미나미 시오리와 그녀의 딸, 야마다, 시마다까지 한자리에 모이게 한 미조구치 집에서의 소고기 전골 식사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식이 상에 올라온 식사 장면의 백미가 되겠다. 허락도 없이 주인보다 먼저 음식을 집어먹고 또 다른 사람의 숟가락도 올려놓으려는 행동에 난처한 표정과는 다르게 불청객 군식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미조구치에게서 아내의 부재가 만들어낸 색 바랜 외로움이 소고기 전골의 향기처럼 풍겨 나온다. 비싼 묘석을 팔았다고 했으니 충분히 번듯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도 됐을 미조구치가 굳이 집에서 진한 냄새를 풍겨가며 밥을 준비한 이유처럼 말이다.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은 또한 영화「심야식당」을 떠올리게 한다. 늦은 밤 영업을 시작하는 식당을 찾을 때는 마음 한구석에 박힌 유리조각이 서글플 때이고 '마스타'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강변의 무코리타」의 무코리타 연립 주택은 집주인인 미나미와 입주자 야마다, 시마다 그리고 미조구치에게 '심야식당'이고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스타'일 것이다. 


낡은 연립 주택에서 저마다의 상실을 품고 살아가는 인물이 이렇듯 밥을 같이 먹는 행위를 통해 가슴에 쌓인 짐을 조금씩 덜어주는 모습은 낯설면서 낯설지 않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점심 식사는 항상 같은 공간에서 같은 친구들과 먹었고 대학교 시절 형, 누나 선배들은 후배가 혼자 밥 먹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더라도 식당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자리를 채워주던 몇몇 선배의 얼굴이 떠오른다. 심지어 군대에서조차 삼시 세끼 전부를 선후임과 먹었(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과거를 회구하며 떠오르는 익숙함과 아련함의 감정이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에 살고 있음은 원치 않아도 상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식사를 함께 하던 일행은 온데간데없고 혼자 먹는 밥이 문화의 트렌드가 되어 소비되는 세상인 동시에 핸드폰 화면 너머에서 같이 밥 먹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상을 찾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상실을 품은 채 갓 지은 흰쌀밥의 연한 찰기로 연대를 맺는 것은 전문의의 진료나 전문가의 상담이나 처방받은 약보다 덜 명확하고 덜 확실하며 따라서 부족한 효과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그리 거창한 것일까. 서로 마주 앉아 밥 한 숟갈 같이 뜰 이조차 없는 사람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바로 마주할 그 사람일 테다. 학교가 끝나고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같이 저녁밥을 나눴던, 나누고 있을, 나누게 될 가족의 누군가 혹은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처럼. 노을이 지기 시작해 어두워질 때까지 무코리타牟呼栗多의 시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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