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퍼펙트 데이즈」평론
드라마, 일본, 독일
2024. 7. 3 개봉
감독 빔 벤더슨
주연 야쿠쇼 코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음악편지 # 1
안녕하세요. 히라야마입니다. 저를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첫 번째 편지는 제 이야기로 채워보겠습니다.
저는 도쿄 시부야에 혼자 살면서 공공 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람입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잠든 여명을 깨우는 빗질 소리에 항상 눈을 뜨죠. 일어나면 꼭 이부자리 정리부터 깔끔하게 합니다. 이후 일층으로 내려와 양치질을 하고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콧수염도 정리를 합니다. 명색이 청소를 업으로 삼은 사람인데 지저분한 모습을 보일 순 없습니다. 일층에서 할 일이 전부 끝나면 분무기를 챙겨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베란다에 제가 키우고 있는 작은 화분들에 정성껏 물을 줍니다. 뿌리에도 뿌려주고 이파리에도 빼먹지 않고 물을 주죠.
이제 출근할 시간입니다. 벽에 깔끔하게 걸어둔 작업복을 챙겨 입고 목에는 흰 수건을 두른 뒤 일층 현관으로 향합니다. 현관 벽 선반에 가지런히 둔 집 열쇠와 차 키와 필름 카메라와 잔돈을 하나씩 놓아둔 순서대로 챙깁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하늘이 저를 맞이하죠. 지긋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점차 밝아오는 태양빛이 덜 씻겨나간 어둠을 밀어내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절로 옅은 미소를 베어 물게 하는 광경이지요. 밀려가는 어둠처럼 아직 조금의 무게가 남아있는 잠은 하품으로 뱉어내고 집 앞 자판기로 걸어가 캔커피를 하나 뽑습니다. 아침 식사 대용이랄까요.
차에 앉아 벨트를 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출근길 음악을 고릅니다. 아, 요새 젊은 친구들은 본 적이 없을 텐데, 저는 카세트테이프라는 것으로 음악을 듣습니다. 60-70년대 올드팝을 즐겨 듣죠. 차를 출발하고 담당하고 있는 첫 화장실로 가는 길에 스카이트리가 눈에 들어오는 그때에 맞춰 음악을 재생합니다. 왜냐고요? 글쎄요, 그때부터가 진정 하루의 시작이 시작되는 느낌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점심 식사는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우유입니다. 점심시간 전에 청소하게 되는 화장실 근처에 조용한 신사가 있어 그곳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점심을 해결합니다. 제 친구 나무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고, 나무들이 길게 뻗은 팔과 손가락이 오후의 태양빛과 어우러져 하늘을 장식하는 광경은 매일 보지만 매일 새롭고 또한 정겹습니다. 이 모습을 놓치기 아쉬워 항상 들고 다니는 필름 카메라로 찍어둡니다.
담당하고 있는 화장실 청소가 다 끝나면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하늘을 뒤로하고 퇴근을 합니다. 집 이층으로 올라와 작업복과 흰 수건은 제자리에 깔끔하게 걸어두고 동네 목욕탕으로 향합니다. 항상 제가 도착할 때면 목욕탕이 막 영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이용객도 많지 않고 조용하고 안온한 분위기에서 편하게 씻을 수 있죠. 몸을 다 씻고 온탕에 들어가 코 바로 밑까지 잠긴 채 앉아 있노라면 하루 동안 청소를 하며 쌓였던 몸의 피로가 다 풀리는 것만 같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오면 비로소 저녁이 됩니다. 해가 지면 항상 발걸음을 옮기는 지하상가의 작은 식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주인장이 '수고하셨습니다' 와 함께 늘 마시는 술 한 잔과 간단한 안주를 내줍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TV에서는 늘 야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고, 라이벌 관계인 단골손님 둘이서 티격태격하며 TV를 보고 있죠.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아침에 정성껏 정리해둔 이부자리를 다시 펼쳐두고 작은 스탠드 빛에 의지해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습니다. 때로 읽다가 꾸벅꾸벅 졸 때도 있지만 하루의 마무리를 조용한 밤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따뜻한 빛과 작지만 깊은 이야기와 함께 하는 것만큼 평화롭고 행복한 게 또 있을까 싶군요.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끝나갑니다. 이제 보던 책을 덮고 자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제 하루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하루는 이렇게 꾸준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반복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제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다음에는 일을 하지 않는 날의 일상을 들려드리록 하죠.
오늘의 음악입니다. 애니멀스의 "House of The Rising Sun."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음악편지 # 2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제 이야기가 조금은 더 궁금하다는 말이겠지요. 이전 편지에서 약속한 대로 이번에는 출근하지 않는 휴무일의 제 일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일이 없는 날에는 조금은 늦게 일어납니다. 밖은 해가 떠 초록의 나무에 선명함을 더해주고 있지요. 매일 입었던 옷가지와 작업복을 챙겨서 자전거에 싣고 상쾌한 기분으로 빨래방으로 향합니다. 빨래를 넣어두고 헌책방으로 향하면 100엔에 팔리는 문고판 소설이 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계산하고 사진관으로 향합니다. 그동안 찍었던 사진 필름을 맡기고 그전에 현상을 맡긴 사진을 받아들고 새 필름을 사서 카메라에 넣으면 볼일은 다 끝납니다. 워낙 오랫동안 계속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사진관 사장님과 저 사이에 별다른 대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방 청소를 먼저 합니다. 젖은 신문을 돌돌 굴려가며 방바닥을 쓸면 사이사이에 쌓인 먼지를 다 쓸어낼 수 있습니다. 청소가 끝난 후 현상한 사진을 하나씩 보면서 보관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합니다. 언제 처음 모으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방 한쪽 미닫이 장 안에 사진을 보관하는 통이 월별로 가득 차 있군요.
다시 해가 지고 골목마다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이 되면 5-6년째 찾고 있는 단골 술집으로 향합니다. 오늘도 여사장님은 다소 피곤이 물든 얼굴에도 변함없이 친절하게 절 맞이합니다. 다른 술 취한 손님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여유와 기품을 가지고 상대하고는 서글픈 목소리로 멋진 노래 한 곡을 불러줍니다. 사장님의 노랫소리를 뒤로하고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끝나갑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제 자야 할 시간이군요. 일하지 않는 날의 제 하루는 여러분에게 어땠는지요? 출근하는 날과 마찬가지로 제가 선택한 여러 가지 일과가 쌓인 일상은 이렇게 반복해서 굴러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음악입니다. 킹크스의 "Sunday Afternoon."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음악편지 # 3
안녕하세요, 히라야마입니다. 제 편지를 읽은 어떤 분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히라야마 씨 일상에서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라고 묻는군요. 특별한 일이라...... 오래 보지 못했던 조카가 불쑥 찾아온 저녁이 생각납니다. 평소처럼 단골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밤이었지요. 누가 부르길래 돌아봤더니 세상에, 여동생 케이코의 딸인 니코가 아니겠습니까. 한눈에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많이 컸더군요. 제 엄마랑 싸우고 가출해서 하는 말이 '가출하면 삼촌한테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라니,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하고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기도 했습니다. 일하러 가는 저를 굳이 따라오겠다고 하더니 같이 다니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차에 둔 카세트테이프의 노래도 들려주고 제 친구 나무가 있는 신사에서 같이 점심도 먹으면서 넉넉한 시간을 보냈지요.
케이코와 제가 남매이면서도 닮지 않았다는 말을 하길래 내심 케이코의 딸 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케이코가 사는 세계와 제가 사는 세계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색이 점차 겉으로도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케이코의 세계에서 나고 자란 니코에게도 마찬가지일 듯했습니다. 지금이야 홧김에 가출해 호기심에 제 세계와 잠시 겹쳐 있지만 이곳은 니코가 살아갈 세상은 아니니 오래 있어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니코 모르게 케이코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니코를 데리러 케이코가 찾아온 밤은 당분간 잊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때 같은 일상을 공유하고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던 우리 둘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갈라진 길 위로 걸어오게 됐는지.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뵙는 것이 어떠냐는 케이코의 말에 고개를 젓고 가만히 안아준 후 니코와 함께 돌려보냈습니다. 뜻 모를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은 아마도 케이코와 겹쳐있던 그때의 흔적에, 아물었던 흉터 위에 아주 작은 상처가 살짝 났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이것 또한 지나가겠지요. 제 세상은 여전히 일관되게 굴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를 들으며 이 밤 안에 잠겨야겠습니다.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음악편지 # 4
그간 격조했습니다. 히라야마입니다. 여러분의 매일은 어떻습니까? 제 일상은 여전히 힘들면 힘든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매일 아침 저를 깨우는 빗질 소리와 하늘을 물들이는 태양빛과 제 손으로 찍은 사진과 제가 청소하는 화장실과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편지가 여러분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듯해서 어떤 이야기를 드릴까 하다가 지난번에 나눴던 '일상에서의 특별한 일'을 미처 다 못 전해드린 것 같아,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이면 늘 찾는 단골 술집에 도착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문이 잠겨 있었고, 맞은편 가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여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마찬가지로 익숙한 모습 옆에 낯선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은 그 남자를 반갑게 맞으며 가게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괜한 호기심에 조심스레 가게 출입구로 걸어가 내부를 살짝 들여다보니 사장님이 조용히 그 남자 품 안에 안겨 있더군요. 찰나에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라 저는 그 길로 황급히 떠났습니다.
맥주 세 캔과 오래 태우지 않았던 담배 한 갑을 사서 이미 어둠 내린 강가의 다리 밑으로 향했습니다. 가로등 빛 너울거리는 강을 바라보며 급하게 첫 번째 맥주를 끝냈을 즈음 아까 봤던 그 남자가 제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장님과 이혼한 전 남편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혼 후 칠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찾아온 이유를 조용히 알려줬습니다. 암이 심해져 다른 장기로 전이돼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사장님에게 감사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그림자에 그림자를 더하면 더 어두워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직 모르는 게 많은데도 알 수 없게 됐다는 말에 이유 모를 화가 저 가슴 깊은 곳에 피어났음을 느꼈습니다.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은 그분이 선택한 것이 아닐텐데 말이죠. 그대로 보낼 수 없어 가로등이 있는 곳으로 이끈 후 그분과 저의 그림자를 실제로 겹쳐 보았습니다. 계속해서 색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는 말에 울컥해 저도 모르게 '그림자를 겹쳤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것이죠'라며 조용히 화를 냈습니다.
다음 날 출근길,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카이트리가 눈에 들어오는 때에 음악을 틀었습니다. 이번 선택은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었지요. 새로운 새벽이 밝았고 곧 새로운 날이 시작됐습니다. 일견 매일 똑같아 보이는 제 일상 또한 새로운 새벽을 맞아 똑같이 새롭게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를 흘려보낸 선택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저의 세상은, 어딜 가든 눈에 들어오는 스카이트리처럼 높게 우뚝 솟지 않더라도, 발걸음 옮기는 곳곳마다 밝혀주는 태양빛과 함께 똑같이 그리고 다르게 채색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날의 아름다움과 황홀함에 저도 모르게 코 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차올랐던 그날의 출근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