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죽은 시인의 사회」평론
그들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세요
이제는 세월이라고 할 만큼 시간이 훌쩍 지난 초등학교의 기억은 덕분에 많은 부분이 휘발되어 없어졌지만, 얼마 남지 않은 영역 속 아직까지 제자리를 굳건하게 고수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육학년 당시 담임 선생님의 얼굴과 행동과 목소리이다. 다혈질의 강 씨 성의 남자 선생님이셨지만 그만큼 열정 있는 자세로 나를 포함한 학급원 전체를 아끼고 끝없는 사랑을 베푸셨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호되게 혼내시기도 하고, 옆 반 누군가가 우리 반 친구를 괴롭히는 모습에 득달같이 달려와 옆 반 그 친구를 제지했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그 친구는 속된 말로 단단히 혼구멍이 났다. 과연 지금의 학교였다면 가능했을까.) 어린 친구들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기도 했다.
십 대 시절을 가득 채운 중학교와 고등학교, 성인이 되어 몸담았던 한국의 대학과 미국의 대학까지. 수십 년에 걸친 학교생활에서 여전히 맺혀있는 선생님과 교수님의 얼굴, 그리고 그들이 아낌없이 내게 주었던 모든 순간은 때로 내 안의 어느 내가 그 시절에 후회를 끼얹어 망치려 할 때 나를 멈춰 세우는 톡톡한 역할을 한다.
그때와는 사뭇 달라진 세상을 사는 지금, 여전히 행복에 대한 마땅한 정의를 찾아 고뇌하고 슬퍼하고 아주 가끔은 즐겁게 웃는 삶을 마주하며 매일을 지내지만, 단언컨대 그 모든 스승이 채워준 내 학창 시절의 정수는 바로 행복이었다. 유효기간이 아직 한참 남아있는 바로 그 행복이었다. 그렇다면 웰튼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때 그 시절의 우리 친구들은 어땠을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미국의 입시 명문 사립 고등학교 웰튼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토드, 닐, 녹스, 찰리, 리처드, 스티븐, 그리고 제라드가 입시교육에서 한참 벗어난, 강한 자아를 찾고 세상과 소통하여 진실한 인생을 사는 법을 가르치는 키팅 선생님과 만나게 되어 겪게 되는 꿈과 희망과 좌절을 그린 영화이다.
다 때가 있다: 행복의 여러 모습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하고 때가 되면 좋은 짝을 만나 결혼을 해야 하고 늦지 않게 자식을 낳고 길러 다시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무책임한 말만 늘어놓는 어른들의 목소리를 잠시 지워보자. 아주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만 누릴 수 있는 일들을 놓치지 말고 즐기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십 대 시절의 사랑과 이십 대, 삼십 대의 그것은 똑같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익히 겪었기에 더욱 공감이 가는 말이다.
비록 키팅 선생님은 그저 영어 한 과목만을 가르치지만, 학생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복리가 붙는 것처럼 크게 변화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되살려 활동하는 것을 필두로 스티븐과 제라드는 라디오를 제작해 노래를 듣고 부르며 춤도 춘다. 짝사랑에 빠진 녹스는 긴 망설임 끝에 마침내 용기를 내어 사랑을 고백한다. 빼어난 외모와 재력가 부모들 뒀지만 다소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찰리는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여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찾아 나간다.
연극 오디션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에 극도로 흥분하여 좁은 방을 뛰어다니며 환호하는 닐의 모습을 보자. 영화 초반, 웰튼 아카데미 입학식 날부터 보여준 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공부 모임을 이끌고 룸메이트 토드를 챙기는 만들어진 어른스러움과 아버지의 강요에 졸업 앨범 제작을 포기하는 닐의 얼굴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저 천진난만함이 눈앞에 생생하다.
잘난 형과 차별하는 부모님 때문에 항상 주눅이 든 채 매사에 지레 포기하고 마는 토드에게로 눈을 옮겨본다. 토드 내면에 담긴 짙은 예술가의 모습이 키팅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한 편의 짧은 시로 탄생한 수업 종료 종이 치기 직전의 순간이 강렬하다. 웃음기 없던 토드가 처음으로 터트린 폭소 또한 키팅 선생님의 수업에서 탄생한다.
즉, 상기 학생들이 점차 억압적인 학교생활에서 각자가 즐거워하는 일을 찾아 자신만의 인생을 조금씩 빚어내고 있음을, 아이들의 표정 변화에서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다. 키팅 선생님과 학생들이 처음 대면한 수업 시간과 이후의 수업을 비교해 보면 알기 쉽다.
행복 없이는 자신도 없다
긴 학창 시절에서 유일하게 기억에서 빠르게 흘러나간 것은 고등학교 삼학년 때의 기억이다. 당시에도 대학입시가 고등학교 교육의 주된 골자였기에 개별 학업의 질적 수준과 무관하게 학업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모든 수업은 수능 시험에 초점을 맞춰 진행됐으니 키팅 선생님이 보여준 수업 진행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적이 좋은 소수의 친구들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고 나머지 다수의 표정은 다양했으나 그 교집합 어디에도 행복한 얼굴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때의 일 년이 기억에 오래 남을 리 만무하다. 그때보다 대학 입시 경쟁이 더욱더 치열해진 지금, 학생들에게 고등학교는 고사하고 중학교 시절마저도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을지 의구심이 든다.
키팅 선생님의 철학에 감화되어 스스로를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토드와 닐은 조금씩 행복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지만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결말 또한 비슷하다. 혹은 더 상황이 안 좋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연극 오디션에 합격 후 호평을 받으며 연극 무대를 꾸민 닐은 절대 인정해 주지 않고 학교마저 강제로 옮기겠다는 아버지의 폭거에 결국 목숨을 끊는다. 닐의 아버지는 본인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이 모든 책임을 키팅 선생님에게 전가하고 키팅 선생님은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때 아이들의 부모를 동원해 아이들로 하여금 키팅 선생님을 쫓아낼 근거가 될 진술서에 서명을 하게 강요한 교장의 행동은 마땅히 폭력이라고 해야 한다.
수업에서는 키팅 선생님의 도움으로, 수업 외적으로는 닐 덕분에 점차 마음의 문을 열어가던 토드 또한 진술서에 강제로 서명을 해야만 했고, 닐을 잃은 후 키팅 선생님마저 떠나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 토드의 자괴감에 빠진 표정은 차마 오래 보고 있기 힘들 만큼 아프고 괴롭다. 지금도 회자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책상 위에 올라가 키팅 선생님을 떠나보내는 토드의 얼굴을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비추는데 이 부분에서 잠시 멈추고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보자. 학기 초기의 토드로 되돌아간 듯한 얼굴이 거기에 있다. 갓 피어난 꽃잎이 모두 떨어져 나가 꽃받침만 겨우 살아남은 꽃이 거기 서 있다.
행복을 만들어 주세요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사회에 진출한 성인이라면 그럴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청소년이 대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의 매일을 가득 채워야 하는 것은 일상의 행복이다. 아무것도 아닌, 정말 사소해 보이는 순간이 그들에게는 평생 남을 추억이 될 수도 있고 악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보다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앞으로 만날 누군가, 앞으로 겪을 무언가가 아니라 어릴 때 차곡히 쌓아둔 기억 상자 속 추억이기 때문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나면 항상 며칠씩 상상에 빠진다. 토드와 녹스와 리처드와 스티븐과 제라드는 키팅 선생님이 떠난 이후 어떤 학교생활을 했을까. 차별받거나 따돌림을 당하진 않았을까. 퇴학당한 찰리는 어떤 삶을 마주했을까. 시류에 편승할 수밖에 없어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 나머지 학생들은 원했던 대학에 진학해 결국 빛나는 명패를 자기 책상 앞에 둘 수 있었을까. 과연 그 친구들은 행복한 기억을 가진 채 인생을 살아갔을까. 그 기억을 자기 자녀에게도 물려줬을까.
통계청에 따르면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자살 충동 원인의 1위가 학업 문제라고 한다. 또한 청소년 3명 중 1명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연구도 있다. 끝없는 경쟁으로 인해 극단적 개인주의를 몸에 두르고 사막화가 되어 버린 일상을 살며 결국 현대의 허무주의에 적응해 버린, 적응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에게 이런 각박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권할 것인가.
영화는 비록 학교의 모습만을 그려내지만 사실상 가정과 학교,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거대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당연한 작은 담론을 던지는 것이다. 나에게, 내 자녀에게, 내 가족에게 그리고 내 이웃에게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