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거나 아쉽거나
입맛은 주관적이다. 아니, 주관적인가?
맛있는 건 그냥 맛있고, 맛없는 건 정말 맛없다. 그게 사실이다. 누구는 소곱창을 인생 음식이라 하고, 누구는 한 입 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니까 결국, 입맛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그런데 그런 입맛에도 뭔가 기준 같은 걸 매기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왔다. 대표적인 게 바로 ‘미슐랭 가이드’.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흑백요리사가 화제가 되면서, 우리나라 유일한 미슐랭 3 스타 셰프(2024년 기준) 안성재와 그의 레스토랑 모수가 큰 주목을 받았다.
물론 미슐랭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하지만 미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참고해 보게 되는 일종의 ‘지도’ 같은 존재다. 보통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고 하면, 고급스러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값비싸고 정갈한 코스 요리, 번쩍이는 오픈 키친과 와인 페어링까지. 그런데 재미있는 건 꼭 그런 형태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방콕의 쩨파이(Jay Fai)나 홍콩의 팀호완처럼, 길거리 음식이나 대중적인 딤섬 가게도 별을 받은 적이 있다. 미슐랭이 어떤 기준으로 별을 주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호기심이 생긴다. 이 집은 왜 받았을까?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그래서 나도 하나씩, 도장 깨듯 찾아가 보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꼭 미슐랭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인생 맛집’이라 불리는 곳을 찾아가 먹어보고, 내 나름의 기준을 세워보는 것. 그게 또 요즘 나만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1. 오스트리아 빈의 미슐랭 3 스타 ‘슈타이어렉’
2023년 여름, 나와 내 친구는 입대 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가볍게 돌고 있던 중, 문득 ‘이왕 온 김에 한 끼쯤은 최고의 미식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작정 예약을 걸었고, 운 좋게 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곳은 오스트리아 빈의 슈타트공원 한복판에 자리한 레스토랑 슈타이어렉(Steirereck). 우리가 방문했던 당시에는 미슐랭 투스타에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18위였고, 지금은 무려 미슐랭 3 스타에 월드 베스트 22위까지 올랐다. 점심 코스는 직접 메뉴를 고를 수 있었고, 네 가지 요리로 구성된 선택형 코스였다. 가격은 155유로. 배낭여행 중이었던 우리에겐 결코 가벼운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기대도 컸다.
유리와 금속 구조로 된 건물은 주변의 푸른 나무들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차갑지만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여행 가방 속 옷 중 가장 말끔한 셔츠를 꺼내 입었지만, 막상 문 앞에 서자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내가 이런 곳에 들어가도 되는 걸까' 싶은 기분.
이 식당의 시그니처와 같은 빵 트롤리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20여 가지의 다른 종류의 빵이 카트에 한가득 담겨있다. 설명을 듣고 추천도 받고 나면 내가 먹고 싶은 빵을 고른다. 재밌고 흥미로운 요소다. 아뮤즈부쉬와 함께 식사를 시작한다.
첫 번째 요리는 Char with Beeswax, Yellow Carrot 'Pollen' & Sour Cream. 이름부터 정신이 혼미해진다. 사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마치 답안지를 찍듯이 이 요리를 골랐는데, 갑자기 밀랍 틀에 갇혀있는 생선을 어떤 액체를 부어 굳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다. 그러더니 금세 아름다운 요리가 등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냥 생선이 입에서 녹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두 번째는 Veal Beuschel with Chive Dumpling. 보이셸(Beuschel)은 비엔나의 전통 스튜 같은 음식으로 송아지의 심장과 폐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위에는 만두빵 (Bread dumpling)이 올라간다. 내 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내장의 깊고 진한 맛이 느껴졌다.
그다음 선택은 Roebuck with Asparagus, Goutweed & Juniper Shoots. 찾아보니 Roebuck은 수노루였다. 정말 균일하게 익혀졌다. 그리고 그 옆의 생소한 채소들.
디저트는 Alexander Lucas Pear with Beeswax, Whey & Buckwheat. 들어보지 못한 품종의 배와 촉촉한 크림, 그리고 아이스크림. 마지막까지 절대 단순하지 않다.
귀엽고 달달한 녀석들을 집어먹으면서 길었던 식사가 마무리된다.
요리들은 직관적으로 “맛있다!”기보다는, 다채롭고 복합적이었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쌓아 올린 맛의 구조 속에서 나는 조금 헤맸다. 입 안에서 펼쳐지는 향과 식감은 너무도 낯설고 섬세해서,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내 어휘력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다.
맛보다는 감상에 가까운 식사였다. 단순한 한 끼가 아니라, 어쩌면 하나의 뮤지컬을 본 듯한 경험. 그 세계의 언어와 리듬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분명히 인상 깊었다. 낯설었지만, 아름다웠다. 그렇게 우리는 낯선 도시의 중심에서, 잠시 다른 세계를 맛보고 나왔다.
2. 합정의 미슐랭 빕구르망 ‘오레노라멘’
국내에도 다양한 미슐랭 선정 식당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빕 구르망에 선정된 곳들은 합리적인 가격대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으로 꼽힌다. 미슐랭의 ‘가성비 맛집’ 리스트라고 보면 된다.
서울 합정에 위치한 오레노라멘 역시 그중 하나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토리빠이탄 라멘 — 진하게 우려낸 닭뼈 육수로 만든 국물 라멘이다. 하얗게 뽀얀 국물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거품이 이 라멘의 시그니처. 반숙 계란과 차슈, 아삭한 파와 목이버섯까지 올라간 토핑 조합도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다.
아— 국물 한 입을 뜨는 순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진하고 구수한 그 맛은, 솔직히 말해 비엔나에서 먹었든 무슨 이름 긴 요리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즉각적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시간이 필요 없는 맛. 딱 한 입 만에 '아,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맛이다.
걸쭉하고 깊은 국물은 마치 보양식을 먹는 듯한 느낌을 주고, 꼬들꼬들한 면의 식감도 아주 만족스럽다. 면을 다 먹고 나서 밥을 말아 한 번 더 먹으면, 그야말로 완성된 한 끼가 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미식도 좋지만, 역시 아직 나는 이런 따뜻하고 정직한 맛이 훨씬 더 좋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나만의 맛 리스트를 하나씩 채워가는 중이다. 거창한 미식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어떤 한 끼가 주는 인상과 기억이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걸 점점 더 느끼게 된다. 좋은 음식은 결국 좋은 기억과 함께 따라온다.
그래서 요즘은 미슐랭 가이드나 다양한 맛집 리스트들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꼭 그 별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안엔 누군가가 애써 찾고 기록한 진심이 있다는 걸 알기에. 가끔은 실망하기도 하고, 때론 기대 이상인 곳을 만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기대’라는 건 늘 그렇게 양날의 검 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진다. 맛집도, 여행지도, 사람도, 인생도. 결국 기대는 그만큼의 허용치를 미리 설정해 두는 일이라, 그 선을 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렇다고 아예 기대하지 않고 살 수도 없고, 또 기대가 있으니 설레고 움직이게 되는 거겠지. 맛있는 걸 상상하고, 새로운 맛을 기대하고, 누군가의 추천에 마음이 끌리는 그 순간들이 좋다.
앞으로도 그렇게, 낯선 음식 앞에 두근거리고, 때때로 실망도 하겠지만—그 모든 경험들이 나만의 미식 여정을 채워줄 거라 믿는다. 음식처럼, 인생도 결국은 그런 한 끼 한 끼가 쌓여 만들어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