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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14화

티끌

1부. 잔향의 문

by 융 Jung

7월 31일, 일요일. 꿈이었다. 정확히는, 꿈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이 뭉개져 있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어제인지 그제인지, 혹은 며칠이나 흘렀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하는 데조차 망설임이 들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기록은 정지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손등에 난 상처를 보았다. 어렴풋이 아리는 감각만이 시간의 존재를 암시해주고 있었다. …정전이었나?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나 스스로에게조차 설득력은 없었다. 전기가 나갔던 것도, 시스템이 멈췄던 것도, 나 자신이 잠들었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단지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된 채 흐름만을 잃어버린 느낌.
그 며칠의 공백은, 무언가가 고의로 지워놓은 것 같았다. 아니면, 나 스스로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펜을 줍다가, 그 순간 짧은 프레임 하나처럼 하연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픈 건 아니었다. 그냥…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실이 아닌 기억, 기억이 아닌 감각, 감각이 아닌 시간.
나는 오늘이 어떤 날인지, 이 흐름의 어디쯤에 내가 놓여 있는지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침은 유난히 밝았다. 여느 주말보다 조금 더 맑고, 조금 더 더운 여름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데 오래 걸렸다. 새벽 두 시에 깬 뒤 다시 잠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깨어 있었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저 몸 깊숙한 곳에서 기묘한 피로가 감돌고 있었다.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탔다. 얼음을 가득 넣은 텀블러를 흔들며 어제의 꿈을 곱씹었다. 딸은 메모를 건넸고, 거기엔 ‘31.4159’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단순한 파이(π)의 숫자였는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어떤 열쇠처럼 느껴졌다. 하연이 노트북에 걸어둔 비밀번호도 그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커피를 들이키며 노트북을 다시 꺼냈다. 그녀의 영상은 더 이상 재생되지 않았다. 파일이 손상된 건지, 아니면 자동 삭제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영상에서 그녀가 말했던 문장 하나는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억은, 절대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내가 지금 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하루하루 내 존재를 뒤흔들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7월의 마지막 날. 곧 8월이다. 그리고 나의 휴가도 다가오고 있다. 아직 휴가지를 정하지 못했다. 연후는 바닷가를 추천했고, 실장은 며칠이라도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조용히 머물라고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오히려 더 분주해졌다. 떠나기 전까지 정리해야 할 기록들, 회의실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로그, 복구 대상의 정체 불명 사용자 목록. 무엇보다도, 하연과 관련된 데이터는 갈수록 더 복잡한 구조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하게 방을 정리하고, 택배 상자를 정리한 뒤, 시스템 백업용 외장하드를 다시 연결했다. USB포트에 꽂는 그 순간,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backup.incomplete. continue? [Y/N]

잠시 망설였지만, 곧 ‘Y’를 눌렀다. 화면에 새로운 데이터들이 열리며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그중 몇 개는 이미 내가 본 기록이었다. 하지만 파일 리스트 마지막에 낯선 항목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 observeEntry("lee.hayun.ghost");

// 관찰자 계층에 이하윤의 잔류 의식 감지

그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건 이름 그대로였다. 하연, 고스트. 시스템이 그녀를 ‘관측자 계층’에서 복원하려 한 흔적. 나는 숨을 고르고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모니터 안에서 깜빡이며 나타난 하나의 명령어가 눈에 들어왔다.

> trace.return.memory.id: 0x0002314; // 관측 메모리 ID 호출

요청숫자 끝의 314는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 이제 그런 말은 의미가 없어졌다. 모든 것은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중심으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커피를 다시 데운 뒤, 창가에 기대어 앉았다. 외장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고, 시스템은 배경에서 느릿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회색빛 구름이 얇게 낀 하늘 아래, 아파트 단지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이상한 건, 지금 이 고요조차도 마치 누군가 설계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고, 사람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름의 마지막 주말, 더위가 가장 짙게 남아 있어야 할 이 시간에… 기묘하리만큼 정지된 세계.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자고 있었냐?” 연후였다.

“아니. 커피 마시고 있었어.”

“오늘도 일해?”

“아니. 그냥 조금 정리하고.”

연후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나 어젯밤에 꿈 꿨어.”

“또?”

“이번엔 진짜 이상했어. 누가 내 이름을 계속 부르는데, 그 목소리가 하연 같더라고. 근데 얼굴은 안 보여. 말도 이상해. ‘지금 아니면 안 돼.’ 그런 말만 반복해.”

그 말에 나는 잠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너… 그거 나한테 전에 말한 적 있었냐?”

“아니. 오늘 아침에 처음 꾼 거야.”

“…시간은?”

“새벽 2시 반쯤.”

정확했다. 내가 하연의 고스트 로그를 확인하고, 침대에 눕던 시각. 나는 휴대폰을 들고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47분.

“혹시 오늘 오후 시간 돼?” 내가 물었다.

“왜?”

“좀 만나자. 정리하고 싶은 게 있어.”

“오케이. 네 집 근처 카페? 그 편의점 옆의?”

“거기서 보자.”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손에서 열이 식지 않았다. 나는 외장하드의 연결을 끊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때였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이수연 실장’.

[오늘 중으로 복구 로그 최신본 정리 부탁드려요.]

[그리고 하연 계정 관련해서,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정리해서 저녁 전까지 공유드릴게요.]

[‘맞을 수도 있다’는 게 무슨 의미죠?]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는 대체로 명확했고, 되도록 감정을 섞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메시지는 달랐다.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나는 화면을 껐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안의 나는 분명 나였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가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그 구조 안에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오후 세 시, 카페 입구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한낮의 열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창가 자리에서 연후를 기다렸다. 손엔 얼음이 가득한 유리잔이 있었지만, 그 안의 액체는 거의 따뜻해져 있었다. 연후는 평소보다 덜 밝은 얼굴로 나타났다.

“잠 안 잤냐?”

“자긴 잤는데, 잔 것 같지가 않아.”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말없이 음료를 주문했고, 내가 미리 시켜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잠시 후 그의 앞에 도착했다.

“꿈 얘기, 다시 해봐.”

내 말에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딱히 줄거리가 있었던 건 아닌데, 하연가 문 너머에서 말하더라고. 너 이름 부르고, 문 열라고. 근데 난 계속 몸이 안 움직였어. 그게 답답해서, 결국 소리치다가 깼어.”

나는 테이블 아래 깍지 낀 손에 힘을 줬다.

“문 너머였다고?”

“응. 유리문 같은데, 안이 안 보였어. 근데 이상하지. 하연 목소리를 그렇게 정확히 기억할 리 없잖아.”

그는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 목소리, 확실히 하연이였어. 웃을 때 목소리 올라가는 거, 말 끝 흐리는 습관. 다 그대로였어.”

“그리고,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했지?”

그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이마에 주름을 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계속 맴돌아. 왜 하필 지금이어야 하는지, 걔가 뭘 그렇게 급하게 전달하려는 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지난밤, 그 비슷한 메시지를 받았다. 딸의 입을 통해, 하연의 음성을 통해, 시스템의 명령어를 통해. 모두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너 하나랑 같이 걔네 집 근처에 갔었잖아.”

“3학년 여름방학.”

“네. 근데 너, 기억나? 그때 하연이 나랑 눈 마주쳤던 거?” 연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파란 셔츠 입고 있었잖아. 넌 그거 보고 한동안 파란색 셔츠만 입고 다녔지.”

나는 웃음을 삼켰다. 그런 사소한 기억조차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게 내 첫 기억이야. 하연과 관련된.”

“그건 네가 꿈에서 본 게 아니라, 실제로 겪은 일이잖아.”

“그 둘의 구분이 요즘 잘 안 돼.”

나는 고개를 숙였다.

“요즘은, 내 기억조차도 시스템 로그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내가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 복원된 것 같아. 누군가가 조립한 기억.” 연후는 한참을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거, 병 아니야?”

나는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냥 내가 아픈 거였으면.”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엷은 노을이 아파트 단지의 외벽에 붙어 있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아래 반사된 내 얼굴은 조금 낯설었다. 익숙한 윤곽 속에 낯선 그림자가 있었다. 집 안은 낮 동안 켜둔 에어컨 덕분에 선선했다. 짐을 풀지 않고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노트북도, 폰도 손에 들고 싶지 않았다. 하루 동안 쌓인 정보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돌고 있었고, 어느 것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얇은 담요를 배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거실은 금세 어둠으로 가득 찼고, 창밖의 불빛은 차분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치 우주가 한순간 멈춘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감각도 없이. 그리고, 그 침묵을 깨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눈을 떴다. 거실의 구조가 달라져 있었다. 책장이 있던 자리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테이블은 낮은 좌식 테이블로 바뀌어 있었다. 반투명한 커튼 너머에서 빛이 새어 나왔고, 그 안에 작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오늘은 안 더웠어?” 딸이었다. 이번에는 또래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공책을 들고 있었고, 의자에 앉자마자 펜을 꺼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왜냐면, 기억이 너무 빨리 사라지니까. 그리면 남잖아.”

나는 무릎을 끌어당겨 손으로 감싸고 앉았다. “근데, 기억은 꼭 남아야 할까?” 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남기지 않으면 없어지는 거잖아. 그리고 없어지면, 나도 없어지는 거니까.” 그 말은 마치 깊은 어둠 속에 던져진 조각 유리처럼, 반짝이고 날카로웠다. “근데 아빠, 오늘은 나 말고 다른 사람 생각 많이 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람, 하연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딸은 손에 들고 있던 공책을 내밀었다. 거기엔 이상한 모양의 원이 겹쳐져 있었고, 그 안에 나와 그녀 그리고 또 다른 이름 하나가 쓰여 있었다. ‘하연’

“이건 네가 그린 거야?”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 개가, 계속 돌고 있어.”

“뭐가 돌고 있는데?”

“시간이랑 기억이랑, 생각이랑. 그런데, 시간이 이미 없다는 거랑 세상이 여러 개라는 거만 빼면 윤회랑 같대. 아빠는 윤회가 뭔지 알아?”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깼다. 아파트 밖은 이미 깊은 밤이었고, 노트북은 대기 모드로 꺼져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고, 시계는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딸이 그렸던 그 원의 모양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세 개의 원이 겹쳐지고, 한가운데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존재. 그것이 어쩌면, 지금의 나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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