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잔향의 문
8월 3일, 수요일 연후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식탁에 앉자마자 휴대폰 지도를 펼쳐 들고는 오늘은 동해 북부 쪽 해변을 다녀오자고 말했다. 이름이 생소한 작은 해변이었다. 관광객도 거의 없고, 현지인들만 안다는 조용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벌써 차 키를 챙기며 내게 선크림을 던졌다. 해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한 시간 남짓 달렸을 무렵, 길가에 펼쳐진 얕은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백사장 한편엔 낡은 구조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바닷물은 그 위를 조용히 넘나들고 있었다. 우리는 간이 파라솔을 세우고 돗자리를 깐 뒤, 맥주 두 캔을 까서 햇볕 아래에 늘어졌다. 나는 바다를 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물결은 일정한 주기로 밀려왔고, 해초 몇 조각이 백사장에 남았다가 다시 끌려갔다. 그 단순한 반복을 보며 나는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갔던 첫 바다, 그날의 흑백 사진. 젖은 발로 남긴 모래 위의 흔적들. 그러나 그 기억 속 아버지의 얼굴은 흐릿했다. 그리고 곧 하연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녀와 바다에 간 기억은 없지만, 묘하게도 이 풍경은 그녀와 어울렸다. 설명할 수 없는 연결감이었다. 점심은 근처의 작은 어촌 식당에서 해결했다. 메뉴는 단출했다. 된장찌개, 오징어볶음 그리고 갓 구운 생선. 연후는 식당 벽에 붙은 오래된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 않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보다 더 느린 것이 있었다. 내 안의 시간. 어딘가에서 기억이 늘어지고, 뒤엉키고 있었다. 연후는 그런 내 표정을 읽은 듯, 뜨거운 국물에 밥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하연 관련해서, 뭔가 더 떠오른 거 있어?”
나는 잠시 숟가락을 멈췄다. 그의 질문은 예상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식탁 위의 물잔을 들고 입을 축였다. “떠오르기보다… 뭔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느낌이야. 마치 이전의 기억이 내 안에서 다시 조립되는 것처럼.” 연후는 놀란 눈치였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낮게 말했다. “기억이 조립된다… 그거, 되게 시스템 같네.” 나는 피식 웃었다. 그 비유는 맞는 말이었지만, 말한 당사자가 연후라는 게 조금 의외였다. 그가 그런 말을 꺼낼 만큼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오래된 방파제로 걸음을 옮겼다. 파도는 쉴 새 없이 부딪혔다. 방파제 끝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짧은 현기증이 지나갔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연후는 몇 걸음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연후는 라디오를 틀었다. 뉴스 속보였다. 아침에 발표된 천문 데이터 분석 결과, 며칠 전 보도된 '우주의 가속 팽창 중지' 현상이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일부 영역에서는 미세한 수축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연후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주도 휴가 끝나고 복귀하는 건가.” 나는 웃지 않았다. 그 뉴스는 단순한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는 확신. 그리고 그 흐름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이상한 감각. 우리는 말없이 숙소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하다가, 나는 노트북을 열고 다시 `sys_trace_0.bat` 파일을 확인했다. 여전히 구조는 같았다. 그러나 맨 아래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 sync.log.write=initiate_0803;
// 동기화 로그 작성 시작 = 0803
> resync.trigger.date=0803;
// 재동기화 트리거 = 0803
나는 파일을 덮고, 한참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느낄 수는 없었다.
8월 4일, 목요일. 우리는 더 머물지 않기로 했다. 연후도 나도, 휴가가 아직 며칠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 머무는 것이 의미 없다는 듯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침의 공기는 여전히 습했고, 바닷바람은 옷자락을 가볍게 건드렸다. 숙소의 현관문을 닫을 때, 나는 괜히 한 번 더 안쪽을 둘러보았다. 숙소 밖으로 나왔을 땐, 해변 너머로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보다 더 평온하고 더 고요한 풍경. 연후는 차에 짐을 싣고 운전석에 앉았고, 나는 뒷좌석에 있던 보냉가방을 확인했다. 텀블러 안에 어제 마시던 물이 남아 있었다. 차는 해안 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라디오는 오늘도 시시한 뉴스와 음악을 번갈아 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연후는 마치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에서 차를 멈췄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연후는 커피를 사왔다. 나는 차 안에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이 감각이 멀미처럼 느껴졌다. 도심에 들어섰을 무렵, 하늘은 흐려 있었고 건물의 창문마다 에어컨 실외기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연후는 내 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한 손으로 핸들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잘 쉬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엔 혼자 오든가, 아예 못 오게 되든가 하겠네. 이런 여행은.” 나는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그는 차창 너머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이듯 말했다. “이상하잖아. 우리가 같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사진은 하나도 안 남았어. 내가 찍은 것도, 네가 찍은 것도.”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확인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후는 마지막으로 나를 힐끗 보고는 차를 돌려 떠났다. 나는 가방을 든 채 문 앞에 서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앱을 열었다. 그리고 곧,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밤, 집에 돌아온 나는 다시 `sys_trace_0.bat` 파일을 열었다. 이번에도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 resync.confirm.log=complete_0804;
// 재동기화 확인 로그 = 8월 4일
8월 5일, 금요일. 전날 밤부터 이어진 감정의 여진은 아침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아파트 복도, 반쯤 열린 현관문 그리고 어제 짐을 두었던 거실 한가운데가 여전히 어수선했다. 텀블러 뚜껑을 닫지 않은 채 세워뒀고, 냉장고 문이 아주 약간 열린 상태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젯밤의 내가 분명히 정리했을 터인데, 그 작은 불일치는 불쾌할 만큼 신경을 긁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이메일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도착해 있지 않았다. 이수연 실장도 그날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팀원 몇 명은 검찰 발 의뢰 자료 정리 때문에 오전 내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나 역시 하연의 메모리카드 관련 로그를 하나하나 다시 검토했다. 전날 추가된 `resync.confirm.log=complete_0804` 라는 문장은 무언가의 완료를 의미했지만, 그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오후가 가까워질 무렵, 커피를 가지러 간 탕비실에서 연후에게 전화가 왔다. “사진 진짜 없어.”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아?” 나는 대답을 유보했다. 그가 말하는 이상함은 내가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로 옮기면 불안이 현실화될까 두려웠다. “하연 얘기인데,” 그가 이어 말했다. “혹시, 그 사람 요즘 꿈에 나온 적 있어?” 나는 말없이 종이컵에 물을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야.” 그날 밤, 퇴근 후 노트북을 켰다. `sys_trace_0.bat`은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었고, 텍스트 편집기로 열자 로그는 추가되어 있었다.
> restore.sync.memory=partial_0805;
// 기억 복원 동기화 = 일부, 8월 5일
나는 노트북을 덮고,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억의 복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내 안에서는 불분명한 장면들만 자꾸 교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