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잔향의 문
8월 1일, 월요일. 출발 하루 전날 밤은 잠들기 어려웠다. 전날 짐은 미리 챙겨두었고, 노트북과 외장하드는 뺼지 넣을지 몇번을 고쳐 생각하고는 결국 챙겨 넣었다. 실장은 분명히 말했다. “이번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머리를 꺼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흘끔 보며 웃었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은 어차피 멈추지 않을 걸요’라는 말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람은 오전 일곱 시에 울렸다. 의외로 개운했다. 창밖으로 빛이 비쳐들었고, 간밤에 잠시 내렸던 소나기의 흔적이 베란다 유리에 물기처럼 남아 있었다. 커튼을 젖히자 희끗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엿보였다. 습기 없는 맑은 공기, 드문드문 흔들리는 나뭇잎.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한 모금 마신 뒤 커피를 컵에 부었다. 얼음을 몇 개 넣었지만 금세 녹았다. 커피의 맛은 언제나 같지만, 오늘 아침은 이상하게 씁쓸했다. 내가 무언가를 두고 떠나는 것 같다는 생각. 그것이 사무실이든, 하연이든, 딸이든, 혹은 지금 이 현실 그 자체든. 연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발 준비 완료. 너희 집 앞으로 곧 간다.]
[바다 냄새 맡을 생각하니까 좀 두근거리네.]
도착한 연후의 차는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탁한 에어컨 냄새가 물씬 났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며 연후는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태호 형님, 강릉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조수석에 올랐다.
“7일이나 쉰다니까 좀 실감이 안 나네.”
“쉬는 게 불안한 병 걸린 사람처럼 말하네.”
“딱 맞는 말이네.”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막히지 않았다. 차 안엔 연후가 미리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가 흘렀고, 창밖은 점점 녹음이 짙어졌다. 가평을 지나 동해로 빠질 무렵, 연후가 불쑥 물었다.
“태호야. 너 그 딸아이, 언제부터 꿈에 보기 시작했냐?”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처음은 기억 안 나. 근데 요즘은… 말이 점점 많아졌어.”
“그 애, 나랑 비슷한 또래야?”
“아니. 일곱 살 정도로 보여. 더 어릴 때의 모습도 있고.”
연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틀었다. 그 후 한동안은 조용했다. 차 안엔 오직 도로 소리와 음악만이 존재했다. 그러다 강릉 시내가 가까워질 무렵,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왔다.
“국립천문대는 오늘 정오, 기존 우주 팽창 이론의 보완에 대한 기자회견을 예고했습니다. 일부 관측소에서는 팽창 속도의 비정상적인 감속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중력파 관측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분석입니다.”
나는 연후를 흘끗 쳐다봤다.
“요즘 뉴스가 예전보다 훨씬 이상하지 않냐?” “아니, 예전엔 우리가 그냥 덜 이상해서 그런 거 아닐까?” 우리는 한참 웃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이내 조용해졌다.
낮에는 전국이 폭염주의보로 달아올랐다. 강릉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 연후의 차 안은 좀처럼 시원하지 않았다. 나는 운전석 옆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하연에게 메모리카드를 건넨 순간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마음 한 켠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연후가 갑자기 물었다.["그 여자, 요즘도 생각나?”
“뭐?” 나는 흠칫했다.
“네가 지난주에 말했잖아. 메모리카드 전달하러 갔다가 좀 이상한 기분 들었다고. 그 말 할 때 표정이 딱, 신경 쓰는 얼굴이더라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응. 별일 없었는데도 자꾸 떠올라.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연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런 사람 있지. 말도 안 되게, 전에 어디서 봤던 것처럼. 근데 조심하세요. 그런 기분은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복잡한 무언가일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죽은 내 여친의 언니라는 점도. 뭐, 그렇다고.”
나는 대꾸 대신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눈을 감는 순간, 하연이 손에 메모리카드를 쥐고 바라보던 표정이 떠올랐다. 뭔가를 알아버린 사람의 표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설명할 수 없는 슬픔.
그 감정은 처음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어쩌면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도 본 적 있는 표정 같았다.
그날 밤, 강릉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깨어 창밖을 바라봤다. 바닷바람은 선선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뜨거웠다. 침대맡에 놓인 휴대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메시지는 없었다. 괜히 기대했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녀와 다시 연락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자꾸만 생각났다. 문득, 딸이 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아빠, 그 사람 다시 만나면 안 돼. 그 사람은 아내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했어.”
그때는 장난처럼 들렸던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딸이었던 사람이 아내였을 수도 있다면. 아내였던 사람이 딸일 수도 있다면. 그건 얼마나 끔찍하고 아름다운 진실일까.
이 인연은 돌고 도는 윤회의 고리 속에 놓여 있는 걸까. 마치 정보가 다른 시뮬레이션에서 불완전하게 복사되듯, 사람도 그렇게 어딘가에서 반복되는 것일까. 그녀가 낯설고도 익숙한 이유,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진실을 전부 알게 된다면, 나는 과연 그녀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 연결된다는 뜻이고, 연결은 결국 책임을 불러온다. 사랑이란, 그 책임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숙소는 조용한 해변 마을이었다. 민박집은 연후가 예전에 와봤던 곳이라며 자신 있게 예약했다. 도착한 집은 시골스러웠지만 단정했고, 방에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바다 습기가 섞인 공기가 느껴졌다. 짐을 내려놓고 잠시 눕자마자 눈이 감겼다. 낮잠은 단지 몇 분일 뿐이었는데, 깊게 빠졌던 것 같다. 잠에서 깨자, 어두운 방 안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린 듯한 잔상이 남아 있었다.
“아빠, 여기까지 잘 왔네.”
“그런데 이건 네 꿈이 아니야.”
나는 벌떡 일어났지만, 연후는 거실에 없었다. 부엌 쪽에서 물소리가 났다. 조용히 손을 씻던 연후는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꿈 꿨지?”
“어떻게 알았어.”
“딱 얼굴에 써 있더라고.”
그날 저녁,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생선구이와 소주를 나눠 마셨다. 바다 냄새가 소금처럼 짙게 코끝에 맴돌았고, 밤은 고요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연후가 문득 말했다.
“이런 별 것 아닌 기억도 죽을 때까지 남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중얼거렸다.
“기억되는 한, 존재하겠지.”
돌아오는 길, 연후는 근처 슈퍼에 들러 뭔가를 산다며 따로 움직였다. 나는 숙소로 먼저 돌아와 멍하니 벽에 걸린 오래된 액자를 바라봤다. 액자 속에는 누렇게 바랜 흑백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어떤 가족이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같았다. 그런데 그 사진 속, 왼쪽 끝에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 있었다. 흐릿했지만, 뒷모습만으로도 느껴졌다. —하연. 그녀가 이 장소에 온 적이 있을까. 가능성은 낮았다. 이 민박집은 연후가 처음 알게 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고, 나는 이곳을 처음 온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가방에서 외장하드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하연의 메모리카드에서 복사한 `sys_trace_0.bat` 파일은 여전히 동일한 이름으로 폴더 안에 존재했다. 나는 그 파일을 텍스트 뷰어로 열었다. 이전에는 의미 없는 명령어처럼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후 유사한 시스템 로그가 연속적으로 출력되었다.
> layer.sync.delay=+0007; // 계층 동기화 지연 = 7
> trace.ref.index=23_hyn37; // 참조 대상 = 하연, 37세 시점
나는 숨을 멈춘 채 그 코드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실존하지 않는 폴더 경로, 존재하지 않는 사용자 계정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복원하려는 시스템의 시도가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바다 쪽에서, 마치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