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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13화

티끌

1부. 잔향의 문

by 융 Jung

7월 25일, 월요일. 월요일 오전, 나는 출근길에 연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 너머로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휴가 안 갔냐?”

“이번 주까지는 근무야. 다음 주부터 일주일.”

“어디로?”

나는 대답 대신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 정해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행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연후가 먼저 웃었다. “너답다. 휴가를 앞두고도 계획이 없다니.”

회사에 도착하자 실장은 이미 회의실에서 로그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이제 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에요. 기억을 설계한 흔적이 있어요.”

“누가 설계했죠?”

“그게 문제예요. 설계자가 없어. 시스템 자체가 이 구역의 기억을 보정하려는 것처럼 보여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이름으로 복원 요청이 들어왔다는 사실 그리고 시스템이 그걸 스스로 실행 중이라는 것. 모두가 말이 되지 않았다. 실장은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조태호 씨, 휴가 계획 있으세요?”

“예? 어, 뭐. 다음 주요.”

“그 전에 정리할 게 많아요. 이 안건, 당신이 주도적으로 맡아야 해요.”

그녀의 말투는 무겁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안에서도 무언가 서서히 결정되어가고 있었다. 복원이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점심시간, 연후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그는 이번 여름에 강릉 근처 작은 바닷마을로 갈 계획이라며,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그냥 바다 보면서 좀 쉬자. 요즘 너 반쯤 맛이 갔어.”

나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입가에서만 맴돌았다.

“그래. 조만간… 결정할게.”

그녀가 자리를 떠난 후, 모니터가 한 차례 깜빡였다. 시스템 로그 창이 자동으로 열렸고, 알 수 없는 경고 코드가 빠르게 올라왔다. 처음 보는 경고였다. 이건, 누군가… 안에 있다는 뜻인가?

> multiverse_sync.warning: collision detected.

실장은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중 시뮬레이션 간 간섭이 관측되고 있어요. 아직 공개된 정보는 아니지만, 국립 시스템센터 내부에서 자료를 분석 중이라고 들었어요.”

나는 그 문장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모든 것이 내 주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내가 무언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기분. 오후 내내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실장은 오후 늦게 종이 서류 몇 장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하연의 시스템 사용 이력이에요. 본래 삭제되었어야 할 기록이었는데, 복원되었어요.”

익숙한데 낯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 user.leehayun.sim-231-south.kor

그녀는 아직 시스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존재했던 기록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밤이 되자 나는 컴퓨터를 껐다. 하연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고,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차갑고 멀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아주 조용하게 꿈의 조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7월 26일, 화요일. 출근길부터 창밖은 흐리고 공기마저 무거웠다. 에어컨을 튼 차량 내부는 적막했고, 평소 듣던 라디오조차 켜지 않았다. 조용한 운전석에서 나는 멍하니 앞을 응시하다가, 정지 신호에 멈춘 김에 잠깐 눈을 감았다. 어젯밤의 꿈이 채 빠져나가지 않은 탓이었다. 딸은 이번에도 내게 무언가를 말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 모양만 남아 있는 얼굴, 목소리는 없었고, 대신 차가운 바람이 등을 훑는 듯한 느낌만 또렷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데도 실장의 자리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팀원들은 하나둘씩 들어오며 조용한 인사를 나눴고, 회의실에서는 이미 화면 테스트가 진행 중이었다. 회의 시작 전, 실장은 나를 따로 불렀다.

“오늘,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노트북을 들어 회의실 안쪽으로 이동했다. 우리 둘만이 있는 회의실. 실장은 노트북 화면을 내게 돌려보이며 말했다.

“정영호 박사 연구팀에서 어제 저녁 늦게 자료를 하나 공유해왔어요. 복원된 로그인데, 놀라운 건… 여기예요.”

그녀는 한 줄의 텍스트를 가리켰다.

> layer.sync.delay=+0007 // 동기화 지연, +7 프레임

문자열은 익숙했다. 내가 주말 내내 들여다보았던 그것이었다. 실장은 나를 지켜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쪽도 같은 값이 나왔군요. 이건 단순히 시간이 밀린다는 뜻이 아니에요. 기억이, 지연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이 두려움인지, 희미한 기대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실장은 노트북을 닫고 조용히 덧붙였다.

“박사님 쪽에서 오늘 오후에 화상회의를 하자고 하셨어요. 조태호 씨도 참여했으면 해요.”

오전은 그렇게 지나갔다. 팀 회의에서 다룬 내용은 형식적이었고, 사람들은 시스템 버그에 대한 이야기 대신 주말에 다녀온 캠핑 얘기를 더 길게 했다. 그 말들이 먼 곳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흐릿하게만 들렸다. 나는 계속해서 눈앞에 깜빡이는 숫자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0007.

점심시간, 연후에게 문자가 왔다.

[휴가 일정 정했냐? 나는 8월 첫 주에 들어갔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폰을 내려놓았다. 그 어떤 일정도 쉽게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깥 풍경은 평온했지만, 내 안의 시간은 흔들리고 있었고, 들키기는 싫었다. 오후 세 시, 정영호 박사와의 원격 회의는 정각에 시작되었다. 회의실의 조명은 조금 어두웠고, 천장의 환기 팬 소음이 낮게 깔려 있었다. 실장은 내 옆에 앉아 있었고, 모니터에는 박사와 연구팀 몇 명의 얼굴이 타일처럼 떠 있었다.

“조태호 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사는 짧게 인사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이 로그들, 전 세계적으로 18건 정도 보고됐습니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만 네 건, 그것도 특정 위도 안쪽에서만 발생했어요. 이건 단순 오류가 아닙니다.” 그는 화면을 전환하며 로그 샘플을 보여주었다. 반복되는 구조, 특정 지연 값 그리고 동일한 키워드:

되돌리기(복원 지점 복귀 시도).point, sync.delay, image.cache…

“공통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대상자 주변에 죽은 이의 디지털 흔적이 있습니다. 둘째, 로그가 일정 시점 이후 스스로 복구를 시도합니다. 셋째, 복원 과정에서 ‘지연’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이 지연은… 기억의 간섭을 의미하는 걸 수도 있어요.”

나는 숨을 들이켰다. 죽은 이의 흔적이라면, 하연. 복원 로그는 마이크로SD에서 시작되었고, 지연은 분명히 내가 본 로그에도 존재했다. 회의가 끝난 뒤, 실장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증상,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요?”

“꿈입니다. 반복되는 꿈. 딸이 나옵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항상 일곱 살 전후의 모습이고, 날씨나 시간, 계절이 현실과 다릅니다. 그녀는 항상 말해요. ‘아빠가 먼저 말해줘야 해.’ 황당하실 거 저도 압니다.”

실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건 티끌이에요.”

“티끌이요?”

“요즘 전 세계에서 이 현상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들은 꿈에서만 나타나고, 정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요.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현실과 연결되는 암시를 던지죠. 박사 쪽에선 이걸 ‘캐시 메모리 형태의 의식’이라 부르고 있어요.”

그녀는 말을 멈췄고, 나는 잠시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지금, 나에게……?”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선택된 거예요. 시스템의 안쪽으로.”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작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의 일시적 오류라면, 왜 나는 그 안에서 기억을 복원하고, 하연을 다시 떠올리고, 꿈속 딸의 말을 되새기고 있는 걸까.

퇴근 무렵, 실장은 내게 작은 봉투를 건넸다.

“이건 지난달 하연가 마지막으로 백업한 파일 목록이에요. 백업 장치는 개인용 NAS로, 삭제된 건 아니지만 접근 권한이 잠겨 있어요. 복호화 키를 알아내면 열 수 있어요.”

나는 그 봉투를 가방 안에 넣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물건인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풍경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간판은 익숙한 글자였고, 도로는 매일 다니던 길이었지만, 사소한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히 주차장을 가로지르던 작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없었고, 오래된 상가 벽면의 간판이 하루아침에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뭔가 잘못된 퍼즐처럼 어긋난 채로 이어진 거리의 풍경은, 오히려 너무 완벽해서 불안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딘가 낯선 공기가 먼저 느껴졌다. 평소와 같은 온도, 같은 향기, 같은 조도인데도, 모든 감각이 틀어져 있었다. 나는 가방을 두고 곧장 노트북 앞으로 갔다. 실장이 준 봉투 안에는 작은 메모지 한 장과 외장 저장 장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 노트북에 연결한 순간, 장치 인식음은 났지만 파일 탐색기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연결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로그를 열어보니, 접속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고, 파티션은 살아 있었으며, 볼륨 라벨도 존재했다. 그런데 아무런 파일도 없었다. 메모지를 펼치자,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접속은 허용되지만, 목격은 제한된다.’ 이게 하연의 손글씨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필체에는 익숙한 무언가가 있었다. 얇고 둥글게 휘어지는 자음과, 미묘하게 들쭉날쭉한 간격. 나는 노트북에서 RAW 뷰어를 열어 장치의 섹터를 직접 읽어들였다. 그리고 한 줄씩 비트열을 해석해 나가던 중, 어느 블록에선가 반복되는 문장이 보였다. phase.confirm.leehayun 문장 끝에 세미콜론조차 없었지만, 이건 명백히 누군가가 의도한 정보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데이터 저장이 아닌, 거의 시스템 내부 명령처럼 짜인 구조였다. 나는 그 문장을 복사해 노트에 붙여두고, 블록을 조금 더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줄에서 발견한 또 다른 구문.

> restore.point=07-21 // 복원 지점 = 07-21

이건 단순한 날짜가 아니었다. 지난주, 내가 처음으로 하연의 메모리카드를 열었던 날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방금 전 들었던 회의의 문장이 되살아났다. ‘기억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선택된 사람입니다.’ ‘티끌은 캐시 메모리의 의식입니다.’ 무언가가 분명히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가진 기억, 내가 본 꿈, 하연이 남긴 로그들, 실장이 입에 올리는 단어들 그리고 그들조차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시스템. 나는 커피를 내리려다 멈췄다. 컵 안에 마지막 얼음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아침에 떠마신 커피의 잔재였다. 얼음은 흐릿하게 녹아가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기억도 이와 같을 수 있겠구나. 누군가의 체온이 닿은 뒤 조금씩 녹아 사라지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어떤 조각. 그 조각은 단단하지도, 온전하지도 않지만, 분명히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 꿈의 조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빠, 진짜 이름을 잊은 거야?” 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너무 생생해서, 마치 방 안 어딘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나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오후 아홉 시, 나는 모니터를 끄고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전등을 끄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몸속 어딘가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고 살아가는 기분. 그것은 하연의 죽음도, 메모리카드의 기이함도, 실장의 냉정한 어조도 아닌, 내가 ‘내가 아닌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실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커튼 틈으로 새어든 가로등 불빛이 벽에 사선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아래 나는 숨을 죽인 채 누워 있었다. 천장의 미세한 균열, 냉방기의 점멸등, 창밖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차 소리. 이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문득 낯설고 인공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 안쪽에서 파동처럼 느리게 퍼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소리도 없고 형태도 없었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하연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처럼 정면을 응시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표정이 아니었다. 아주 미세한, 그러나 확실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지우는 건, 쉬웠어요. 문제는 잊히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는 꿈속임을 인지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 “당신이 보게 될 거예요. 이 시스템이, 끝나기 전에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묻고 싶었다. 왜 나였는지, 왜 하필 그 메모리카드였는지 그리고… 그 아이는 누구였는지. 하지만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고, 다만 멍하니 하연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기억은 저장되는 게 아니라, 복제되는 거예요. 같은 사람도, 같은 시간도 반복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뒤돌아 사라졌다. 나는 그 순간 깨어났다. 방 안은 고요했다. 냉방기는 꺼져 있었고, 공기는 묘하게 따뜻했다.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 부엌으로 가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커피 대신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르고,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한 조각 넣었다. 얼음은 뚝뚝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작은 울림은 마치 오래된 기억 하나가 복원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지 않은 채,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곱씹는 대신, 나는 그냥 앉아 있기만 했다. 텅 빈 공간, 말 없는 시간. 그 안에서 어떤 감정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 시스템이 오류를 겪고 있다면, 나는 그 안쪽에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익숙한데 낯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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