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햄버거
남자는 소년이었을 시절을 기억합니다.
셰이크쉑이 한국에 상륙했을 때 나는 교회 두 누나들에게 이끌려 셰이크쉑을 방문하게 되었다. 기억은 흐릿했지만, 그날의 화창한 날씨와 즐거운 대화는 선명하다. 한 명은 모델처럼 키가 크고 예쁜 누나였으며, 한 명은 이렇게까지 사람이 긍정에너지가 과분하지 않게 넘칠 수 있을까?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웃고 낄낄 빠빠를 잘하여 부담 주지 않는 존경스러운 누나였다.
나는 비싼 가격대의 버거와 세트 메뉴가 없어 당황하였고, 뭔진 모르지만 끌리는 이름의 버거를 주문했다. 누나들이 값을 지불해 줘서 미안하기도 하고, 함께 하자고 말하던 것이 고맙기도 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새로운 환경에 낯설어하는 나를 누나들은 텐션을 끌어올려 호들갑? 같은 편안한 부위 기와 유머로 재미있게 이야기하였고, 시끌벅적하고 북적이던 테이블에 우리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유대감은 한층 심화되었다. 햄버거가 나오고 첫 입을 물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맛이 깔끔하기도 했고, 고급 햄버거라는 느낌이 머리에 띵 울리기도 했다. 너무 맛있었다.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어 누나들과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도, 강남에 갈 때면 셰이크쉑은 여전히 내게 작은 위안이었다. 직장에 다니게 되어서도 선임들이 셰이크쉑을 사주었던 기억이 있다. 먹고 싶은 거 먹자고 하였고 나는 셰이크쉑에 가자고 했다. 당시 특별한 날 셰이크쉑을 간다고 하였는데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었다. 신입 사원의 성장 과정에서의 불안감을 선임들도 느꼈을까, 논리가 중요한 회사에서 그날만은 웃고 햄버거를 먹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셰이크쉑과 나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따듯하고 즐거웠던 누나들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듯 브랜드는 나의 뇌리에 친숙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적어도, 브랜드와 추억이라는 두 키워드로 글을 쓸 때 망설임 없이 이 일화를 적기 시작했다.
누나들이 나에게 준 따뜻함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지금은 현실의 부담에 숨을 헐떡이지만, 어느 순간, 나의 짐을 덜고 내가 편안히 웃을 수 있을 때, 내가 지금 느끼는 것처럼, 돌이켜보면 따듯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선물해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태도와 상대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아는 태도를 몸에 익혀 낯선 환경에 편안하고 즐겁게 되어버리도록, 조금은 이 사람과는 어디라도 좋다는 찰나의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도록 나의 평소 언행을 더 긍정적이고 믿음직하게 바꿀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