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퐁 Apr 09. 2023

우주가 많은 방

2.

비밀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비밀이 탄로 난 채 그대로 머물 수는 없다. 때가 되면 그곳을 떠나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결국 늘 때가 왔고 우리 가족은 흔적을 감춘 채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언제나 떠나야 하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였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그 바람에 우리 가족은 이삿짐 싸는 데 도가 텄다. 솔직히 짜증 나는 건 그 많은 이사와 전학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매 순간 안간힘을 써야 한다. 누가 정해 놓은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친구가 생기고 적응이 좀 됐다 싶으면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도시로 훌쩍 떠나야 했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밍밍과 도하는 친한 친구 사이거나 친자매, 혹은 사촌이 되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몇 번째 이사 때였나, 열 살 무렵에 밍밍과 도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 이사 안 가면 안 돼?”

그러자 밍밍과 도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들이 되어 내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과의 정확한 의미를 잘 몰랐을 때인데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게 되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기대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이곳은 좀 다를 거야, 이 사람은 왠지 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대는 늘 나를 배반했고 아닌 척하려 애썼지만 나는 늘 상처받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에 맞게 커진다. 기대가 없으면 비밀을 털어놓을 일도 없다. 단단한 벽 뒤에 나를 감추면 꽤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랑 마을에 이사 오기 전에는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일 년 정도 살았다. 밍밍과 도하는 그곳에서 인테리어 사무실 ‘마이 시스터즈’를 운영했다. 주로 오래된 주택을 리모델링하는 공사를 했는데 믿을 만하다고 소문이 나면서 단골도 꽤 생겼다. 누군가 허락 없이 밍밍과 도하의 사진을 찍어 지역 카페에 비방글과 함께 올렸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마이 시스터즈 사무실과 둘을 안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수많은 악플이 달렸고, 이미 진행 중인 공사가 취소되어 여러 업체에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많지 않은 전세 보증금마저 위약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랑 마을로 가자.”

도하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들은 걸핏하면 “이랑 마을이라도 갈까?”라고 말했지만 한 번도 나를 데려간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랑 마을이 이어도나 오즈 같은 환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도하에게 집을 통째로 빌려줄 친구가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도하는 밍밍을 만나기 전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었다. 



이전 01화 우주가 많은 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