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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퐁 Apr 09. 2023

우주가 많은 방

3.

Q121. 이사는 잘 했어?     


저녁을 먹고 올라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익명 질문함에 새로운 글이 올라와 있었다.     


A121. 응. 아직 적응은 안 되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전에 살던 집 창밖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었는데, 여기는 창밖으로 바다가 보여.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좋아.     


글을 쓰자마자 알림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 글에 실시간으로 답하고 있었다.      


Q122. 바다가 가까운 마을이라니. 부럽네.     


익명 질문함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답해 주었다. 마음의 거리를 자로 잴 수 있다면 아마 현실의 그 누구보다 익명 질문함에서 만난 사람들이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바닷가 쪽 한 건물에서 기묘한 빛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노랑과 초록 어디쯤으로 보이는 빛이 오로라처럼 일렁였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별 것 아니어서 허탕을 치더라도 편의점이나 들러 오자 싶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부엌 쪽에서 밍밍과 도하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사 기념으로 맥주를 마시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엄마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걸었던 길인데도 어둠 속에서는 전혀 달라 보였다. 

해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상가들은 죄다 불이 꺼져 있었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파도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해 줄 뿐이었다. 창문으로 봤던 기묘한 불빛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빛이 새어 나오던 건물을 어림짐작으로 찾아보았다. 일 층 상가에 임대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어 있는 이 층짜리 건물이었다. 지하에도 공간이 있는지 어둑한 계단이 내려다보였다.

분명 처음 보는 곳이 틀림없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풍경이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 어떤 공간이 있을지 궁금했다. 어두운 계단은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통로처럼 보였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 말고는 그저 고요한 밤이었다. 고요한 어둠 너머에 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계단벽에 아주 조그맣게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볼펜으로 대충 끄적인 것 같았다.    

  

宇宙多房     


‘우, 주, 다, 방?’

그나마 읽을 줄 아는 글자들이었다. 나는 ‘많을 다’ 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보통 다방에는 차 ‘다(茶)’를 쓰지 않나? 마시는 차가 아니라 많다는 뜻의 ‘다(多)’라니. 그럼 ‘우주가 많은 방’이라는 뜻인가?

달칵.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하 계단이 환하게 밝아졌다. 누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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