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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Mar 19. 2024

유명산_돌친절한 산

아이와 함께하는 100대 명산 놀이

코스 난이도 - ★★★★☆

주차장 - 가능 (유명산자연휴양림 09시~18시)

입장료 - 1인 1000원, 주차료 3,000원

에어건 - 입구 O

근처 식사 - 칼국수, 해장국 등

코스 - 1야영장 - 우측 진행 정상 - 계곡 코스 - 원점

거리 - 왕복 9.73km , 4시간 50분 (휴식 30분 포함)

특징 - 아이들과는 여름 계곡 트래킹 추천




생각과 현실이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습니다. 3월의 산은 여전히 깊은 겨울이에요. 앙상한 나뭇가지에 숨은 겨울산은 보기보다 혹독합니다. 봄맞이에 한창인 도시와는 사뭇 달라요. 경솔했던 판단으로 몸이 고생하네요. 아들도 함께 말입니다. 이른 봄을 찾아 오른 산은 눈의 왕국이었어요. 녹지 못한 눈이 얼어붙은 채 웅크리고 있는.


열한 살 아이와 함께한 아이젠(미끄럼방지용 등산장비) 없는 겨울 기슭의 산행 이야기입니다. 유명산은 경기도 양평에서 가평으로 넘어가는 곳에 자리해요. 서울양양고속도로 설악 IC 부근을 나와 십여 분을 달려 유명산자연휴양림이 이릅니다. 유명산의 들머리에요.


아침산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전날 밤 미리 도착했어요. 잠든 어둠이 놀래지 않도록 조용히 이동합니다. 일부러 찾아온 어둠 아래의 세상을 깨우고 싶지 않아요. 도시를 밝히는 불들이 하나 둘 꺼지고 나자,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촘촘한 유리알처럼 박힌 빛의 공간을 넋을 잃고 바라 봐요. 얕은 지식으로는 별들이 자리한 규칙성을 모두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 규칙적인 무질서에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도시인에게 별 헤는 밤은 축복이에요.


주위의 사물이 조금씩 눈에 들어옵니다. 침낭 밖으로 몸을 꺼내요. 동트기 전은 역시 춥습니다. 자동차의 전기가 모두 소진되어, 새벽 사이 전기히터가 꺼져있었군요. 안전을 걱정해 무시동히터를 틀지 않은 탓에 차 안이 냉골입니다. 언제부터 꺼져 있었던 걸까요. 예상값에 조금씩 균열이 오는 날이네요.


편안한 집을 두고 차에서 밤을 보내며 굳이 불편함을 좇는 스스로가 우스워 혼자 웃고 맙니다.실소지요. 그야말로 사서 고생입니다. 불편하고 귀찮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고생이에요. 재미있습니다. 이불 밖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감지한 아이는 침낭 안으로 웅크리고 들어가네요. 마치 작은 다람쥐 같습니다. 그럼 이제 녀석을 세상으로 꺼낼 시간입니다.

낄낄낄. 악당이 되어보죠.

자연휴양림을 들머리로 정상에 이른 후 계곡 코스를 따라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입니다. 주차한 곳을 포함하면 9km, 등산코스만 따진다면 7.5 km에 이르는 거리예요. 해발 862m로 꽤 높습니다. 먼저 다녀온 마니산과 관악산 보다는 험로겠군요.


휴양림으로 진입해 주차장을 지나는데 성인키를 훌쩍 넘는 눈 언덕이 있습니다. 2월 말에 내린 폭설의 흔적이군요. 계곡 한가운데에 있는 유명산의 얼음분수와 묘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물속에서 솟은 얼음기둥이 신기한지 아이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해요.


자연이 알려 주는 클리셰였을까요? 이쯤에서 눈치채고, 자동차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맙니다. 아이젠 없이 산행을 시작해요. 좌측은 계곡코스, 직진 방향은 정상으로 오르는 최단코스입니다. 돌아가는 10분의 길을 귀찮게 여긴 선택은 아찔하고 어려운 산행이라는 대가로 돌아 왔어요.


녹지 못한 눈이 그대로 산을 덮고 있습니다. 소복소복 쌓였을 부드러운 눈은 이제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이방인의 발을 밀어내요. 백에 있던 스틱 두 개를 모두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줍니다. 지난 산행에서 스틱을 사용해 본 녀석은 스틱에 체중을 싣고, 미끄러지는 다리를 지탱합니다. 제법이에요.


유명산 코스는 꽤 불친절합니다. 깊은 산속을 오르는 동안 너른 시야를 주지 않아요. 조금 돌아가도 괜찮을만한데, 직진으로 오르라고만 합니다. 바스락 밟히는 눈이 '아~이~젠' 이라고 소리 내는 거 같아요. 차에 두고 온 아이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빠가 조금 더 마음 여유를 가져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간혹 마주하는 실수나 착오들이 생기기도 하지요. 오늘처럼 치명적일 때도 있고,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합니다. 크고 작은 실수들일지라도 그저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면 됩니다. 화를 내서 해결된다면 화를 내겠지만요. 살아 보니 그런 적은 거의 없어요. 방향이 맞다면 언젠가는 이를 거예요.


그저 오르기만 합니다. 산중에 보이는 것은 앙상한 나무들과 빛을 반사하는 눈이 전부입니다. 아이의 보폭에 맞추어 걷습니다. 이미 동이튼 하늘이지만 아침의 빛이 산 속에 닿으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능선으로 해가 오르며 밤새 웅크리던 산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산을 오르고, 숨을 고르고. 다시 산을 오르고 숨을 고르며 계속 걷습니다. 마치 트랙을 도는 기분입니다. 경치들은 그대로네요. 얼음 산을 오르다 보니 힘이 두 배, 세 배로 듭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씩 지치는 눈치예요. 힘들만 합니다. 3월의 산은 여전히 겨울이에요.


중턱에 이르고 나서야 유명산의 줄기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잠시 머물 큰 바위를 찾아 백팩을 내려놓습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주위를 돌아봐요. 참으로 넓은 산이군요. 꽤 경사가 있는 산이고요.


산에서 먹는 라면으로 행복해 하는 아이를 바라 봅니다. 그 소박한 웃음이 그저 좋습니다. 잠깐의 꿀맛 같은, 아니 라면맛의 휴식을 보내고 나서 백팩을 고쳐 맵니다. 주변을 다시 살펴요. 아주 작은 쓰레기라도 모두 되가져 갑니다.


가끔 아이가 물어보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사회의 아주 작은 약속들에 대해 물어보며 아빠를 당황하게 만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빠 왜 어른들은 쓰레기를 산에 버리고 다녀?"

따뜻한 msg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다시 산을 오릅니다. 최근에 이렇게 설산을 오른 적이 있나 싶어요. 아이젠 없이 겨울 산을 오른 적은 더더욱 기억에 없습니다. 녹지 못한 눈의 질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친절해요. 올라왔던 빙판길로 그냥 내려가자니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진퇴양난이에요. 바라보는 설산과 겪는 설산의 차이를 절감하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요. 그 와중에도 뒤를 돌아보며 아빠를 챙기는 아들이 대견합니다. 작은 소리에도 뒤를 돌아보며 아빠를 걱정합니다. 스틱 두 개를 혼자 쓰는 것이 마음에 걸렸나 봐요.

아빠는 괜찮다. 걱정말고 함께 가자꾸나.”


사실 이럴 때 쓰려고 예전에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금 더 열심히 수련할 걸 그랬습니다. 김용작가님께 배운 경신법(輕身法)으로 몸을 띄우는 경공술을 시전 하거나, 무력답수(無力踏水)의 상승무공을 사용해 아이를 안고 단번에 정상으로 날아가고 싶은데.


왼발이 닿기 전에 오른발을 딛고, 오른발이 닿기 전에 왼발을 딛으면 됩니다. 방법은 아는데, 제게는 육갑자의 내공은 없네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거리에 비해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쏟고 나서야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석에 둔감한 아빠지만, 오늘만은 예외예요. 기특한 아이와 함께 사진에 담아 봅니다.


부드러운 소박함이 좋아 겨울산을 오르면 늘 즐거워요. 겨울의 질감이 발과 귀에 전해져서 걷는 것만으로도 동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들머리에서 희끗희끗한 산을 보고 좋아했던 이유예요. 그런데 큰코다쳤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이렇게 제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눈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줘야 하는 탓에 몇 배로 힘든 산행길이에요.


여러 봉우리들이 중첩된 풍광을 눈에 담고 가슴을 부풀려 최대한 크게 한숨 베어 삼킵니다. 어둠이 밀려난 자연의 아침은 참 웅장해요. 이른 아침이라 등산객이 없어 조용한 정상입니다. 이곳의 공기가 시간을 더욱 더디게 잡아주길 기대합니다. 조금 더 고요한 산을 느끼고 싶어서요.

하산길은 조금 돌아가야 합니다. 올라온 길은 너무 미끄러워 아이젠 없이는 엄두가 나질 않아요. 동쪽을 따라 길이 나있는 계곡코스에 마침 해가 뜨면서 상대적으로 땅이 많이 녹았어요. 주의 깊게 아이를 응시하며 하산을 시작합니다.


꽤 힘들었을 텐데 밝게 웃는 아이가 참 고맙습니다. 계곡코스는 작은 돌들이 많아서 내려가는 길에 발을 접질리기 쉬워요. 중간중간 녹지 못한 눈들이 많이 쌓여있습니다. 스틱을 쿡 하고 찔러보니 족히 50cm는 들어가네요. 사람의 마음은 이미 봄에 닿아 있는데, 아직 자연은 겨울에 미련이 많이 남았습니다. 초록빛 흐르는 계곡물의 청량함과 희끗희끗한 겨울의 흔적이 묘한 대조를 이뤄요.

유명산 코스는 다소 직설적이고 새침합니다. 꾸밈없이 직진으로 올라야 정상에 닿을 수 있어요. 꽤 깊고 울창한 큰 몸집이면서 그 자취를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퍽 재미있는 코스는 아니에요. 내려가는 길에는 돌이 너무 많은 탓에 하체에 피로도가 중첩됩니다. 조금은 불편한 산이에요.


어쩌면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산기슭에 이르는 길이 대단히 아릅답습니다. 깊은 계곡이 내어주는 청량한 바람이 몸을 밀어주고, 시발점을 알 수 없는 생명수들은 산행으로 무거워진 이방인의 몸을 이끌어 줍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몇 개의 돌멩이를 던져 봐요. 풍덩하고 조용한 계곡물에 이는 파문을 보며, 아빠와 아이는 눈을 마주치고 낄낄낄 웃어젖혀요. 어렵고 더뎠지만, 꽤 오래 기억에 자리할 오늘입니다.


정상을 끼고 삼각형의 모양으로 돌아 내려오니 9.5km를 걸었네요. 날씨나 경사도를 고려해 보면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얼음 길을 내려와 눈이 녹은 아스팔트 도로를 밟으며 반가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그제서 긴장이 풀리는 아빠와, 산행을 마쳤다는 안도감을 갖는 아이가 서로를 바라봅니다.


또 하나의 행복을 함께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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