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육체가 아니라 여러 겹의 에너지 층으로 이루어진 존재장(場)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 작업을 해 왔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뻗어 있으며, 그 깊은 차원을 통해 우리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꽤 긴 글을 이어온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사람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우리의 존재 구조가 외부에서 유입되는 정보를 분간하기 어렵도록 짜여 있는 데도 이유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존재의 각 층은 공간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오라(에너지 층)가 자극되면 그 영향이 외부에서 내부로 전해지는 느낌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들끓어 오르는 느낌으로 감지된다.
비유컨대, 전자레인지를 생각해 보자. 전자레인지는 특정 장치로 초당 24억 번 이상 전기장의 방향이 바뀌는 전자기파를 발생시킨다. 그러면 이 전자기파가 음식물 속의 물 분자를 회전시켜 열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 열로 인해 음식 전체가 데워진다. 음식을 데우는 에너지는 외부에서 오지만, 우리에게는 음식물이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존재의 각 층에 가해진 변화가 우리에게 감지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문득 일어나는 감정이나 생각 중에는 내가 아니라 외부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것이 많다. 하지만 그 정보가 '나의 뇌'를 거쳐 인식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내부에서 일어난 '나의 감정' 혹은 '나의 생각'이라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 중 많은 것이 외부의 영향에서 온다. 감정이나 생각에 일종의 집단적 경향이 존재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우리는 이를 조직문화, 민족문화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 아마도 어떤 분들은 그것이 외부에서 오든, 내부에서 생기든 무슨 차이가 있느냐, 원리를 몰라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굳이 물리학까지 들먹이며 원리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물으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다면, '물리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깊이 주목하지 않은 것이다.
'물리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 외부의 영향이 실재적인 힘으로 우리의 존재에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그 힘은 마음 뿐 아니라 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마음이 실재한다는 의미
잘 알려져 있듯이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항상성 유지'가 필수적이다. 우리의 몸은 체온이 1도만 올라가도 생명의 위협이 될 만큼, 안정적인 존재 상태를 유지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질료가 미세한 어떤 입자이고 그 입자의 각기 다른 에너지 상태가 몸과 마음을 구성한다고 보면, 몸이 일정한 에너지 대역에 머무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일 것이다. 그 대역을 넘어서면 얼음이 녹듯이 존재의 형태와 시스템이 흐트러져 버릴 테니 말이다.
실제로 감정 연구의 권위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우리 몸에서 감정 호르몬이 분비되는 이유도 바로 이 '항상성' 유지를 위한 노력이라 규정한다.
화학적 항상성에서부터 협의의 정서에 이르기까지 생명 조절 현상은 언제나 직‧간접적으로 생물의 존재 보존 및 건강과 관련되어 있다. […] 충동-예컨대, 배고픔, 목마름, 성욕-의 충족은 행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분노, 절망, 슬픔을 일으킬 수 있다.
- 스피노자의 뇌(안토니오 다마지오 저)
즉, 우리 몸은 몸이 안녕하고 편안하면 행복감이 느껴지는 호르몬을 분비하고, 항상성이 깨지려는 위기의 순간이 오면 불쾌감을 느낄 만한 호르몬을 분비하여 몸에 발생한 위기 상황을 뇌에 전하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느낌'이 일어나는 공간이 '뇌'라 규정하고, 우리는 심체(心體)가 그 느낌의 공간이라 가정한 차이는 있지만 '항상성 유지'가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가정대로 심체가 존재하고, 몸과 마음이 다를 바 없다면, 심체 역시 항상성 유지를 위한 어떤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끊임없이 낯선 에너지가 유입되면 그 시스템의 안정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만약 해로운지 유익한지 가리지 않고 음식을 마구 섭취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댄다고 해 보자. 처음에는 몸이 최선을 다해 항상성 유지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몸의 노력이란 다름아닌 세포들의 노력이기도 하다), 시스템을 보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결국 탈이 나고 말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호수에 자꾸만 파도가 일면, 처음에는 파도를 가라앉혀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려 애쓰겠지만, 내구성의 한계를 넘어가면 결국 탈이 나게 된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기(氣)의 보존과 안정을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필수조건으로 여겼다.
정신의 입장에서 사람의 기가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듯한 것이다. 기가 끊어지면 정신도 흩어져 떠나 버리지만, 그것은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죽는 것과 같다.
- 『태평경초(太平經少)』(『기, 흐르는 신체』(이시다 히데미)에서 재인용)
앞의 글들에서 우리는 주로 감각의 매개체로서의 심체의 기능에 주목했지만, 사실 감성체는 육체를 보호하는 보호막의 기능도 한다(이를 동아시아 의학에서는 위기 衛氣라 표현한다. 말 그대로 육체를 호위하는 기라는 의미다). 위기의 존재와 역할은 지구 자기장과 지구 내 생명체와의 관계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
인체뿐 아니라 지구도 지구를 둘러싼 보호막에 싸여 있다. 지구자기장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자기장인데, 태양풍이나 유해한 자외선, 우주 광선 등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한다. 한때 피부암 등을 유발하는 자외선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해 주는 오존층이 파괴되어 문제가 되었는데, 이 오존층도 자기권에 포함되어 있다. 즉, 지구 자기장이 우주로부터 유입되는 전자기파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 구멍이 뚫리거나 불안정해지면 지구 내의 모든 생명체가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다.
바람이 고요하고 적정한 온도가 유지되어야 곡식이 잘 자라고 꽃도 핀다. 대기가 불안정한 날이 지속되면 땅도 황폐해진다. 심체의 안정이 우리 세포에 미치는 영향도 이와 같다. 감성체가 안정되어 있고 활기차야 몸도 건강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라 여긴 것도, 인간을 기(氣)라는 에너지의 작용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도 깊이 들여다 보면 이유가 있다.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실재적이고 물리적이다.
언젠가 미국에 살던 친구가 한국에 와서 한 달가량 머문 적이 있다. 미국의 단독주택지에 살던 친구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에어비앤비로 구한 도심의 원룸에 묵었는데, 그 때 '사람이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했었다. 친구는 무심히 한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타인과의 공간적 거리를 확보하며 사는 데 익숙해진 친구는 타인과의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는 도심의 환경에서 무의식적 불편을 느낀 것이다. 물론 친구 자신도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타인과의 거리를 확보하며 고요하던 그녀의 오라장에 너무 많은 자극이 주어지고 있음을 친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을 모두 몰아내고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환경은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특히 정신적 환경으로서는 최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좁은 지역에 인구 절반이 모여 사는 우리 삶의 환경은 정신적 측면에서 안정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겨운 환경이다. 실제로 조금 민감한 분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심한 경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기도 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마음이 아무런 구조도, 원리도 없이 그냥 작동하는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마음은 뇌의 작용이기 때문에 몸만 건강하면 마음도 건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래서 마음을 함부로 다룬다. 그러나 마음도 물리적이며, 이것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유지하고 활용하는 원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마음이 정말로 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감정노동이 힘겨운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도보 여행을 떠났을 때는 종일 걸어도 육체적 피로를 느낄지언정 마음이 힘겹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음에 활력이 차오름을 느낀다. 하지만 거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은 한 시간만 지나도 진이 빠지고 녹초가 된다. 왜 그럴까? 고객이 흔들어대는 심체를 안정시키느라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잔뜩 소모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마음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관이 팽배한 사이, 우리는 무지로 인해 본의 아니게 정신을 학대하며 살았다. 그 결과, 경제 성장은 이루었지만 덕분에 국민의 절반이 정신과를 찾는 지경에 이르렀고,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일이 점점 힘겨워지고 있다. 최근 마음의 안정이나 휴식, 느림, 쉼 같은 말들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도 알고 보면 그만큼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는 기껏 소비의 즐거움을 누리자고 행복과 생명력을, 나아가 지구의 생명력까지 희생하며 살아온 셈이다. 그러니 지금의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해 본다면, 과연 현대 문명보다 우리의 전통 인간관이 미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석가모니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 '무지(無知)'에 있다고 한 마디로 설파하셨다. 만약 백 년 후, 존재의 구조가 과학적으로도 규명되는 시대가 온다면 그 때 미래의 인류는 고대인과 현대인 중 어느 시대가 더 무지했다고 평가할까. 과연 이 시대가 덜 미개한 시대였다고 말하게 될까?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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