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모임 4
어릴 적 나는 책 속에서 머루와 다래만 먹고살았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너른 논만 있는 곳에서 자란 나는 머루와 다래가 궁금했다.
머루는 포도와 비슷하다고 하니 어림짐작이라도 했지만 다래는 도무지 짐작도 안 됐다. 지금이야 키위가 흔하지만 내 어릴 적만 해도 키위는 구경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머루와 다래 열매를 본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비로소 인제에서 머루를 만났다. 포도알보다 작고 성글게 맺혀 있던 머루.
나는 양손 가득 머루를 땄다. 책 속에서 만난 그 은자처럼 머루를 한 알 한 알 먹었다. 붉은빛 없이 까맣게 잘 익은 머루는 시큼 달큼하니 아주아주 맛있었다. 태어나 처음 맛본 머루였는데 그 맛은 끝내줬다.
그다음 해 가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또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캠핑장이 들어섰고 머루는 간 곳이 없었다.
좋은 때는 참 드물게 왔다.
이번 모임은 꼭 들어야 하는 줌 강의와 시간이 겹쳤다. 모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이어폰을 꽂고 모임에 참석했다.
단풍 든 왕머루 잎을 그리기로 했다.
왕머루 잎은 아주 빨갰다. 이렇게 빨간 머루 잎이 있을까 싶었다.
나는 초벌 색으로 나뭇잎에 노란색을 입혔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덧칠해 나갔다.
잎사귀에는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들이었다. 열매가 달콤한 것은 잎도 맛있는 모양이었다. 잎맥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맛이 없어서이거나, 너무 질겨서 일 것 같았다.
거미줄처럼 남은 잎맥을 마지막에 그려 넣는 걸로 나는 그리기를 마쳤다.
그리기를 끝낸 우리는 저마다 그린 그림을 둘러보았다.
히어리님이 그린 왕머루 잎은 빨갛게 단풍 든 속살이 거뭇거뭇했다.
바쁜 일이 있어 미처 다 그리지 못하고 간 미루나무님은 집에서 그림을 완성해서 올렸다.
미루나무님이 그린 왕 머루 잎의 속살에도 짙푸른 빛깔이 있었다.
나는 왕머루 잎을 찍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히어리님과 미루나무님이 그린 왕머루 잎이 훨씬 왕머루 잎과 비슷했다.
아무리 빨갛게(?) 단풍이 든 왕머루 잎이라도 왕머루는 단풍잎이 아니었다.
이어폰을 꽂고 강의를 듣느라, 나는 겉으로 발산하는 붉은색만을 주목했다.
짙푸른 속살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거다.
참 드물게 오는 좋은 때를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는 사이 놓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