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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백송자 Mar 07. 2023

눈바래기

2022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당간지주처럼 서 있던 동백나무에서 붉은 등이 타올랐다. 봄이라 말하기에는 아직은 쌀쌀한 날에 강아지가 들어왔다. 이제 갓 어미젖을 때고 복슬복슬했다. 어쩌다 절화하는 동백꽃에서 어미의 젖꼭지를 기억하는지 꽃송이를 가지고 한참 동안 놀았다. 연신 혀끝으로 꽃 향을 훑는 것이 어미와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 같기도 하여 짠했다. 녀석의 집은 사랑방 아궁이 근처 동백나무 바로 앞에 있다. 


녀석의 혈족은 제법 귀티 나는 핏줄이라고 한다. 내게는 녀석의 족보가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고 그냥 시골 똥개에 불과하다. 식구 중 누구도 녀석에게 그럴싸한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고 그냥 야 야, 하면 녀석은 저를 부르는 줄 알고 잽싸게 달려온다. 입이 짧아 먹는 게 시원찮아 그런지 아니면 품종 자체가 작달막한 건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몸이 그대로다.  


최근 녀석의 일과는 온종일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드러눕는 게 전부다. 녀석의 등줄기를 쓰다듬어 주는 따듯한 손길은 사람이 아닌 햇볕과 바람이다. 어쩌다 동백나무에 깃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노래를 목청껏 부르면 반가워 컹컹거린다. 아주 가끔 새들은 화답이라도 하듯 오종종하게 내려앉는다. 밥그릇에 말라비틀어진 밥알을 새들이 부리로 쪼아 대어도 녀석은 그저 좋아 바라만 본다. 이마저도 잠깐이고 새들은 저 멀리 날아가고 없다. 새들의 뒤꽁무니를 두리번거리며 눈으로 쫓아가 보지만 소용없다. 또다시 적막이다. 


식구들이 탄 차량이 길모퉁이를 돌 즈음이면 녀석은 난리다. 오감 중 어느 것으로 우리를 인지하는지는 몰라도 용케도 금세 알아본다. 뛸 때마다 팽팽해지는 목줄이 목을 옥죄어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신이 난다. 마당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집 지키느라 고생했다며, 얼른 목줄을 풀어 준다. 녀석은 시골집 마당귀에서부터 뒤란까지 구석구석을 한번 휙 둘러보듯 뛰어다니고 나서는 우리 주변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좋아 어쩔 줄 몰라 한다. 


시골에서 빈집을 지키는 녀석을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여러 번 의논을 나누었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갓 젖을 뗀 강아지도 아니고 이제 노쇠한 녀석을 다른 집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치울 수도 없고 난감했다. 가혹한 형벌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시골집에 두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녀석의 생사가 걱정되어 주기적으로 시골에 간다. 대견스럽게도 녀석은 집을 지키고 있다. 사료와 물은 아껴 가며 최소의 에너지만 소비한다. 배설물 처리는 최대한 먼 거리에서부터 좁혀 온다. 생존에 대한 본능은 인간 못지않다. 또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하는 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녀석은 시골집의 수문장 역할이 본디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광활한 들판을 뛰어다녔던 종족의 자유를 녀석은 다음 생에서 누리게 될까. 


녀석과의 해후는 언제나 잠시다. 바쁜 현대인의 생활에 발목이 잡힌 우리처럼 순순히 목줄을 받아들인다. 다시 목줄에 묶이면 이별이라는 것을 알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얌전히 앉아 있는다. 빈집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그렇다고 너무 늦게는 오지 마시오, 하고 말을 건네듯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눈바래기 하는 녀석이 애처로워 쉬이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엄마도 우리에게 눈바래기를 한 지가 수년이다. 어쩌다 한 번씩 다녀가는 자식들을 배웅할 때마다 엄마가 먼저 등을 보인 적은 없었다. 혹여 자식이 한 번 더 뒤돌아볼까 봐 발이 저리고 허리가 아파도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자식을 보내고 돌아선 그 순간부터 또 자식을 마냥 기다려 왔다.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진 엄마다. 병원을 들락거릴 때마다 깜짝 놀라서 휘청거렸다.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고 한숨 돌리고 나면 엄마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 있었다. 어느 정도 회복하여 이제는 정상궤도에 올라섰나 보다, 하고 안심하고 있으면 또 덜컥 멈추기 일쑤였다. 매번 끝이 아니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허공을 가르며 허둥거리는 눈빛. 딴 세상을 바라보는 듯 초점을 잃고 거적눈조차 끔벅이지 않을 때도 많다. 얼굴을 바짝 대고 탈선한 의식을 깨워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채 눈을 감아 버리는 일도 있다. 말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엄마의 손을 잡아 본다. 아직은 따뜻하다. 


오로지 자식만을 바라본 엄마의 일생은 이제 쉼표의 꼬리를 자르며 낯선 곳에서 마침표를 찍으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약손이었던 엄마의 손을 꼭 잡는다. 어쩌면 오늘이 온전히 지나고 나면 내가 엄마를 눈바래기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숨이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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