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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백송자 Mar 17. 2023

호박꽃이 피었다

시든 꽃잎 사이로 석양빛이 붉게 물든다

 서릿발 성성한 날을 앞두고 세상에 나왔다. 햇볕 좋은 날, 벌과 나비의 축복을 온몸으로 받으며 나타날 것이지 어쩌자고. 가을햇볕은 시들어가고 있다. 대지의 것들을 익어가게 하던 따스한 손길을 거둔 지 오래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여미던 쌀쌀한 기운은 낮에도 기세가 점차 등등해지고 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식물들도 이번 생을 갈무리하느라 분주하다. 이러한 때에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은 곳에서 피어난 호박꽃. 


 몇 해 전 식당 유리창 너머로 멧돌호박과 눈이 맞았다. 반들반들한 게 금방 수확한 것처럼 꼭지의 싱싱함이 남아 있다. 아랫부분이 넓적하고 골이 고르게 파진 게 일품이다. 껍질을 쓱쓱 벗겨 호박씨 발라내고 찜통에 푹푹 삶아 호박죽을 끓여먹고 싶은 생각으로 침이 먼저 고였다.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으니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주인장이 다가오더니 호박을 내 품에 안겨 주었다.


 넝쿨째 호박이 굴러온 것이다. 어릴 적 엄마처럼 호박을 쪼개고 껍질을 벗기었다. 모지랑이 숟가락으로 쓱쓱 껍질을 벗겨내던 엄마의 손놀림은 참 가벼웠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단단한 호박을 쪼개는 것도 힘들었고 벗기는 건 더더욱 쉽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쪼개어보니 호박 속에는 오동통한 씨가 소복하다. 쭉정이 하나 없이 실하다. 이것을 한 개도 버리지 않고 고이 말려 보관하다가 올 봄 시골집 텃밭에 심었다. 


 호박은 어찌나 빨리 크고 많이 달리는지 우리 식구만이 먹기로는 엄청 많았다.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몇 개는 늙은 호박으로 성장하도록 아예 따지 않았다. 짚으로 만든 똬리는 아니어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준비했다. 밑동이 썩지 않도록 플라스틱 똬리를 앉혀주니 호박은 안정감이 있어 그런지 더 잘 자랐다. 누런 호박색을 띄며 반질반질 윤기가 났다.  


 가을은 나날이 익어가고 온 세상은 갈무리 하는 시점이다. 호박도 생장을 거의 멈추고 생명의 끈을 어렵사리 붙든다. 이러한 때, 뒤늦게 호박꽃이 피었다. 벌과 나비의 발길은 고사하고 향기조차 없는 꽃, 피어났지만 때가 아님을 스스로 아는지 풀죽어 있다. 백白 바지에 하얀 구두의 노신사 옆에 서 있던 그녀도 처음엔 이랬다.


 그녀는 명목상 건물주였다. 도시 변두리 다가구주택의 소유자다. 일 주일에 서너 번씩 직접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물걸레질을 하고 현관 유리문도 잘 닦아놓아 늘 투명했다. 억척 여성이었다. 젊었을 때는 남의 집 파출부까지 하러 다녔다며 지난날의 고된 생활을 이야기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적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이 꿈은 딸이 대신 이루었다며 자식 자랑도 서슴없이 하였다. 골진 주름살마다 그녀의 삶은 없고 남편과 자식의 인생만이 돌올하니 박혀 있는 듯하다. 


 재정 관리는 전적으로 남편이 하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남편에게 가계부를 수시로 점검받으며 생활비를 타는 신세였다. 가끔은 폭력적인 남편의 흔적을 그녀는 미처 지우지 못하고 시퍼런 멍이 등 채 나타나곤 했다. 그래도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듯 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러 번 반기를 들었지만, 늘 제자리걸음이었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말투에는 초연함이 실렸다. 하지만 말끝에는 언제나 실낱같은 희망이 힘없이 매달렸다. 춥고 어두운 곳에도 쨍하고 해뜰날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이다. 


 먼저 그녀는 배우기 시작했다. 인근 주민배움터에서 생활영어 강좌를 등록했다. ABCD부터 쓰고 또 쓰며 외웠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앞 차량의 차종까지 해독하기에 이르렀다. 거리의 간판도 읽어냈고 아파트 이름도 쉽게 말 하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서도 손주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주문한다. 파스타며 피자의 다양한 맛도 고상한 언어로 말한다.  


 세상에는 조금만 눈을 돌리면 배우고 익히는 공간이 많아졌다. 산업화 시대에 배움의 끈을 놓아야만 했던 노년의 여성들이 자아를 찾고 있다. 뒤늦은 공부를 시작하고 취미를 살리며 재능을 찾아 사회에 봉사하기도 한다. 그녀도 노래 교실, 난타, 서예 등 취미활동을 하며 바쁘다. 몇 해 전부터는 노래로 요양원의 어르신들을 위로하는 봉사를 다니며 나눔의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그녀의 삶도 바뀌었다. 남편에 의존했던 영역을 점차 본인 자체로 이동하며 확장하였다. 통장을 개설하여 임대료를 직접 받았고 건물 청소도 주택관리업체에 맡겼다. 늘 헐렁했던 옷차림도 몸에 맞게 달라졌고 피멍 든 얼굴 자국도 생기지 않았다. 졸혼을 선언하며 여자의 시간을 영글고 있다. 벌과 나비의 손길 없이 달빛에 스러지는 운명이어도 꽃으로 한 번 살아봐야겠다는 호박꽃, 이 굳은 의지를 그녀는 온몸으로 말하며 씩 웃는다. 미소에는 서리가 아닌 영롱한 이슬이 맺혀 늦가을 햇살에 빛난다.


 바람이 호박꽃을 슬쩍 건드리며 지나가자 시든 꽃잎 사이로 석양빛이 붉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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