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자존감, 엄마의 깨달음

"천천히 가도 괜찮아."

수학 앞에서 늘 작아졌던 저의 경험이 만든 나름의 육아 철학이었습니다. 아이의 속도에 맞추면 된다고, 굳이 남들처럼 선행학습의 트랙에 아이를 밀어 넣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거든요. 매일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 연산 한 장, 사고력 한장. 그것이 제가 그어둔 안전선이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매일 조금씩 걷다 보면, 언젠가 자기만의 단단한 보폭을 가질 거라 믿었거든요. 그 느긋함이 꽤 그럴듯한 신념이라 믿었습니다.

착각이 깨진 건 어제 저녁, 아이와 마주 앉아 사고력 수학 문제집을 펼쳤는 데 문제가 어려워서 한숨만 쉬던 아이가 불쑥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나는 수학을 참 못해."

덤덤한 목소리가 명치를 찔렀습니다. 아이는 이어 말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자기만 수학을 못한다는 겁니다. 본인만 못하니 친구들이 수학문제를 설명해 주는데, 설명을 해줘도 이해를 못 해서 친구들이 답답해한다고 했습니다. 2학년짜리의 묵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교실이라는 생태계는 엄마의 온실보다 훨씬 빠르고 가혹했습니다. 제 아이가 한 장의 보폭으로 걷는 동안, 트랙을 한참 앞서 뛴 아이들은 뒤처진 저의 아이를 보고 답답해 했던 거지요. 아이는 제가 쳐둔 여유로운 울타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진도를 훌쩍 빼버린 아이들 틈에서, 제 아이의 자존감은 매일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었습니다. 저의 느긋한 신념은 아이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무방비 상태로 교실에 내모는 올가미였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로 앉혀서라도 연산 문제집을 풀리고, 매일 숫자를 쥐여주어야 했던 건 아닐까.


안다는 건 단지 백 점짜리 시험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래 집단 속에서 작아지지 않을 최소한의 방패였습니다. 친구들의 답답하다는 표정으로부터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힘. 배움이 나를 아끼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아이의 처진 어깨를 보고서야 아프게 또 배웁니다.


그날 밤, 잠든 아이의 작은 등을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수준에 온전히 맞춰줄 수 있는 개인 선생님을 찾아야 할까.

이건 더 높은 점수나 선행학습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한 욕심이 아닙니다. 무너져버린 아이의 속도를, 다시 아이의 숨결에 맞춰 조율해 줄 섬세한 안내자가 필요할 뿐입니다. 학교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나는 원래 못해"라며 스스로를 놓아버리기 전에, "나도 내 속도대로 알아가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쥐여주고 싶습니다.


배움이 진정으로 나를 아끼는 방법이 되려면, 때로는 나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고 내 걸음걸이에 맞춰 동행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제 아이가 교실 한가운데서 스스로를 덜 미워하도록 도와줄 안내자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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