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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 Mar 13. 2024

5화 남자보다 반려견

붉은 고향을 떠나 푸른 강변으로 놀러 온 햇빛들이 마른 잔디 잎에 앉아 한가롭게 발을 까닥거리고 있는 오후. 

목줄을 풀어주자, 솔이가 신나게 달려가네요. 

“안녕? 안녕? 안녕? 안녕하세요?”

사람하고는 한 사람씩, 개 하고는 한꺼번에 인사하는 솔이와 달리 저는 개 하고는 한 마리씩, 사람하고는 한꺼번에 인사했습니다. 그런 후 솔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봄이 엄마가 팔을 두드렸습니다. 

“어마, 저기 좀 봐봐요. 솔이하고 똑같이 생겼어~.”

봄이 엄마가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로 솔이와 똑 닮은 개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와서 보니, 털 색깔이 완전히 다르네요. 그 개는 온통 붉은색이었습니다. 마치 하얀 장화를 신은 듯한 네 발만 빼고요. 앞다리는 목이 긴 장화를 신었고 뒷다리는 목이 짧은 장화를 신었어요. 꼬리는 도넛 모양으로 말려서 등 끝에 얹어져 있었지요. 

붉은 개와 함께 온 보호자는 앳돼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였어요. 그녀는 붉은 개의 목줄을 아주 짧게 잡고 있었죠. 

“누구예요?”

봄이 엄마는 여기 터줏대감 같아서 웬만한 보호자들은 다 알거든요. 

“나도 처음 봐요.”

우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새로운 얼굴을 바라봤어요. 그러나 그녀는 우리 쪽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키 낮은 나무 의자 쪽으로 가버리네요. 얼핏 보니 표정이 심란해 보였는데 나무 의자에 앉아서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이마를 얹었습니다. 

억지로 나왔나 보네.

두 달여 동안 개와 산책하면서 이런 보호자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등 떠밀려서 나온 티를 팍팍 냈지요. 목줄을 꾸깃꾸깃 잡은 손에서, 개가 무엇을 하건 말건 휴대전화만 보는 눈에서, 제사에 쓰고 남은 시루떡같이 심드렁한 표정에서. 그녀는 “왜 내가 개를 산책시켜야 해!”라는 분노 표출 단계에 있는 듯했어요. 이 단계를 지나면 무감각 단계가 오고, 그다음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즐겁게 해 보자는 수용의 단계 들머리에 있었고요.  


네 마리 개가 붉은 개한테로 우르르 몰려갔어요. 냄새를 맡은 뒤 한 마리씩 자리를 떴는데, 솔이는 그대로 머무르며 냄새 맡기를 계속했습니다. 한참 만에 붉은 개의 엉덩이에서 물러나더니 황금빛 눈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어요. 그 눈 속에서 저랑 닮은 영혼이라도 찾는 걸까요?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섰던 솔이가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팔짝팔짝 뛰었어요. 

같이 놀자.

붉은 개도 똑같이 행동했어요. 

좋아, 놀자.

그러나 붉은 개는 놀 수 없었습니다. 목줄이 50cm 정도 짧은 여유밖에 없었거든요. 붉은 개의 목줄을 한 손에 돌돌 말아 쥔 그녀는 붉은 개를 보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붉은 개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알려줘야죠. 성큼성큼 다가가 등을 노크하려는 순간, 그녀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아아아악!”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우는 건가요? 저는 망연히 그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갑작스레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소리쳤습니다.

“이게 딸 키우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요!”

잔디밭에 노란 정적이 흘렀습니다. 바깥소리가 커졌다 사라졌습니다. 저는 숨을 후~ 내쉰 뒤 말했습니다. 

“어찌 보면, 개 키우는 거랑 애 키우는 거랑 비슷하죠.”

“애 키우는 거랑 같은데 자식은 왜 낳아야 해요?”

꽤 무게감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문제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속으로 생뚱한 저울질을 했습니다. MZ세대의 당참일까, 이기적인 무례일까? 

“안 낳을 거예요! 얘만 키울 거예요!”

그녀는 붉은 개를 꾹꾹 찌르듯 가리켰어요. 그 옆에 솔이가 없네요? 붉은 개랑 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떠났나 봐요.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또래 친구 몰티즈를 만나 놀고 있네요. 몰티즈 할아버지가 옆에 있어서 저는 안심하고 원래대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붉은 개가 목줄을 막 끌어당기고 있네요. 

“끼잉, 낑.”

황금빛 두 눈은 몰티즈와 솔이를 향해 있고요. 몰티즈와 솔이가 잔디밭을 달리자, 붉은 몸이 O자가 되었다가 S자가 되었다가 잔디밭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표가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녀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죠. 아니,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눈길이 저를 향해 있을진 몰라도 눈빛 끝이 저에게 닿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어쩌면 방금 소리친 말도 저에게 하는 말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뒤에서 보슬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솔이 엄마가 뭘 크게 잘못했어요?”

봄이 엄마의 목소리가 대답했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 솔이 엄마한테 화를 내고 있어요?”

“그러게요. 깜짝 놀랐어요.”

그때 그녀가 주먹을 들어 허공을 내리쳤어요. 광란의 헤드뱅잉을 하는 록커처럼 머리를 흔들어댔습니다. 꽥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둘을, 어떻게 키워요! 얘, 하나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뒤 무릎 위에 머리를 얹고 정물화가 되었습니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충전용 로봇 청소기처럼.

     

느림보 시추가 흙빛 정적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왔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 붉은 개에게로 다가가더니 엉덩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동안 붉은 개는 갈 수 없는 곳을 향한 애절한 몸부림을 멈추었습니다. 대신 부러움이 다복다복 담긴 눈으로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눈길 끝에는 솔이와 몰티즈가 할아버지에게 간식을 받아먹고 있었죠. 붉은 개가 그 맛을 보듯 검은 입술을 핥고 또 핥았어요.

그때 시추가 붉은 등에 올라타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며 마운팅을 했어요. 그걸 어떻게 봤을까요?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시추를 팍 밀쳐냈습니다.

“야 이놈의 개자식들이 자꾸 올라타! 힘들어 죽겠는데! 계속 떼 내야 하잖아!”

가까운 곳에 시추 아빠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도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어요.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서 다른 개들을 예뻐하고 있었죠. 

봄이 엄마가 말했어요. 

“얘는 그냥 놀자는 건데….”

그녀가 대꾸했습니다.

“지금 애기가 생리 중이란 말이에요!”

“얘, 여자예요. 중성화 수술도 했구요. 생리 중일 때는 안 데리고….”

그녀가 시동 걸듯이 몸을 좌우로 흔들더니 곧 폭발했습니다. 

“왜 내가 자식을 낳아야 해요? 안 낳을 거예요! 얘만 키울 거예요! 얘 하나만 해도 미치겠어요! 어휴! 정말! 아아악!”

주변의 공기가 싸했습니다. 봄이 엄마는 혀를 내두르고 가버렸습니다. 시추 아빠도 시추를 들고 가버렸지요. 막 당도한 하얀 비숑이 아무것도 모른 채 붉은 개의 등에 올라타더니, 또 마운팅을 하네요. 

“아 씨, 하지 말라고!”

그녀가 비숑을 확 밀쳤습니다. 비숑 엄마가 입을 삐죽거리며 비숑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요. 


또 붉은 개와 저만 남았습니다. 이참에 자리를 뜰까? 생각하던 저는 숨을 깊이 들이쉰 뒤 그녀 옆에 앉았습니다. 제가 왕초보 반려인이었을 때, 길을 잃고 낯선 세상에 들어온 듯 주름진 기분이었을 때, 봄이 엄마가 말을 걸어주고 옆에 있어 주어서 온몸을 온탕에 담근 듯 마음이 녹진해졌던 기억 때문에요. 

“개 기저귀가 있던데, 해보세요. 저번에 기저 귀하고 나온 개가 있었는데, 올라타는 개가 없었어요. 지금 여기 있는 개들은 다 중성화했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나중에 중성화 안 한 개가 오면 알려줄게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붉은 개의 목줄을 놓네요. 

붉은 개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렸습니다. 곧바로 솔이와 엉겨 붙었어요. 몸을 곧추세우고 앞다리를 맞붙이고 힘겨루기를 했어요. 잠시 후 둘이 달렸어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잔디밭을 빙빙. 반려인들이 바람처럼 달리는 둘을 바라보며 말했지요. 

“어마, 둘이 똑 닮았네! 신났다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니, 그녀도 신바람 난 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처럼 기쁜 표정이 아니라 불안한 표정이었습니다. 한참을 달린 솔이와 붉은 개는 잔디밭에 퍼질러 누었습니다. 

그때 저쪽 산책로로 지나가던 까만 개가 줄을 끌어당기며 잔디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개들에게 다가가더니 엉덩이 냄새를 맡았어요. 1초, 2초, 3초. 그러곤 그 엉덩이를 떠나 다른 엉덩이 냄새를 또 1초, 2초, 3초. 그러면서 점점 붉은 개에게로 가까이 다가갔어요. 엉덩이를 제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고요. 까만 코로 어떤 냄새를 포착했는데, 그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 추적하는 듯했습니다. 

“저 개는 중성화 안 했어요!”

순간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와다다다 달렸습니다. 그녀가 달려가는 동안 까만 개가 붉은 개 엉덩이로 다가갔습니다. 엉덩이에 코를 들이밀었습니다. 1초, 2초, 3초. 다시 한번 1초, 2초, 3초. 까만 개가 까만 두 다리를 붉은 개의 등에 올렸습니다. 마운팅을 시작했어요. 그 순간 그곳에 당도한 그녀가 까만 개를 발로 밀쳤어요. 

“저리 갓!”

그녀의 고함에 까만 개 아빠가 줄을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까만 개가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네 발을 파닥거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얘가 생리 중이래요.”

뒤이어 도착한 제가 까만 개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난 몰랐어요.”

그러곤 까만 개 아빠가 까만 개를 그대로 공중에 들고 산책로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까만 개를 내려놓았죠. 까만 개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발버둥을 쳐댔습니다.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어요. 노란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죠. 줄도 하네스도 팽팽했어요. 저러다 하네스가 벗겨지기도 하는데…, 걱정하는 순간 까만 개는 아까처럼 공중에 들려 그곳을 벗어났습니다.

붉은 개는 엄마에게 질질 끌려갔고요. 하얀 네 발과 붉은 엉덩이가 마른 잔디밭을 쓸었습니다. 붉은 몸은 최대한 뒤로 젖혀 있었죠. 그렇게 50m쯤 잔디밭을 쓸고 가더니, 마침내 붉은 개도 몸을 바로 세우고 떠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네일 아티스트로 일하는 어떤 여성의 말이 떠올랐어요. 

“우리 집에는 사람 자식은 없고 개 자식만 있어요.”

그렇게 말한 여성은 미혼으로 결혼 생각이 없고요, 언니는 결혼했으나 나이가 많아 출산을 포기했고요, 남동생은 결혼했어도 자식 낳을 생각이 없다고 하네요. 언니와 남동생은 반려견을 각각 한 마리씩 키우고 있고요. 

“우리 부모님 소원이 뭔지 아세요? 개 자식 말고 사람 자식 하나 보는 거예요.”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그녀도 그런 걸까요? 결혼했는데, 아직 사람 자식이 없어서 시부모님께 한 소리 들은 걸까요? 그 일로 남편과 다툰 걸까요? 아니면 우리 집처럼 의논 한마디 없이 남편이 붉은 개를 입양해 온 걸까요? 그래서 저렇게 분노하고 있는 걸까요? 

이어 한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청혼했어요.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살 수 있는지 물었고, 남자친구는 그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죠. 여자친구가 청혼을 받아들였어요. 그 뒤 며칠 동안 반려견과 함께 살아본 남자친구가 도저히 개와 함께 살 수 없으니 개를 다른 곳으로 입양 보내자고 말했어요. 여자친구가 파혼을 선언했죠. 

봄이 엄마가 말했어요. 

“같이 개를 키울 자신이 없으면 결혼은 안 되죠. 개는 장난감이 아니잖아요?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생명체예요. 내 사정에 따라서 버리거나 다른 데로 입양 보내려면 애초에 키우지를 말아야 해요.” 

30대 중반의 미혼 여성인 산이 엄마가 말했어요. 

“그 남자친구는 어떻게든 키울 수 있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실제로 키워보니까 장난 아니었던 거죠.”

산이 엄마에게 보슬이 엄마가 물었어요.

“자기는 결혼 생각 있어요?”

“아뇨. 쟤 보면서 살려고요.”

산이 엄마의 손가락이 산이를 가리켰어요. 산이는 털이 무성한 진갈색 개로 세 살까지 1m 줄에 묶여 사는 마당 개였지요. 오랫동안 묶여만 살아서인지 슬개골이 매우 안 좋아요. 그래서 산이 엄마는 관절에 좋다는 영양제와 사료를 먹이며 날마다 강변 잔디밭으로 데려 나왔어요. 처음에는 배낭에 넣어 업고 나왔지요. 

“후회 없겠어요?”

“나는 남자보다 반려견이 더 좋아요. 그래서 인생계획에서 남자와 결혼을 빼버렸어요.”  


30대 후반이고 기혼인 폼피츠 엄마가 그 말을 받았어요. 

“나도 신랑과 반려견 중 선택해야 한다면 신랑을 버릴 거예요. 신랑이 버림받아 화난다고 얘를 버리면 그때 내가 얘를 입양하려고요. 그 남자친구 참 못됐어요! 어떻게 개를 버려요? 사람을 버려야지! 개는 말도 못 하는데!”

봄이 엄마가 말했어요.

“자기 신랑이 들었으면 서운하겠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얘는 열 번을 말하면 알아듣는데 신랑은 만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거든요. 이러니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어요? 이혼하면 얘만 나 달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뭐래요?”

“알았다, 내가 파양 할게, 니가 입양해라, 하대요. 그래서 그러려고요.”

구름이 엄마가 물었어요.

“원 보호자가 아빠예요?”

“예. 결혼 전에 함께 데려와서 아빠가 키우고 있었어요. 결혼하고 나서 합쳤는데, 요새 얘가 아빠와 자다가 일어나서 힝! 이러고 아빠를 내려다봐요. 그러고는 먼저 도망친 나한테 와서 자요. 아빠가 코를 심하게 골거든요.”

현재 그녀는 둘째 반려견을 입양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아이 낳을 계획은 없고요. 둘째 반려견 입양은 남편이 먼저 제안했고, 그녀가 동의하면서 공동 계획이 되었다더라고요.    

  

“나도요.”

내내 듣고만 있던 오레 엄마가 말문을 틔웠어요. 우리의 눈길이 오레 엄마에게로 향했죠.

“나도 비슷한 상황이 오면, 반려견을 선택하려고요.”

이야기를 죽 들어보니, 오레 엄마는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도 그녀처럼 결혼 생각을 전혀 안 하고요. 결혼이란 격식을 따르지 않으니 집안 어른들의 간섭을 안 받아서 좋다네요. 중요한 커리어 단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요. 

그런데 한 10년쯤 동거하다 보니 권태기가 찾아왔어요. 연애할 때의 설렘도 줄었고 둘이 함께하는 시간도 줄었고요. 종일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날도 있었죠. 

그러던 차에 남자친구가 제안했어요. 

“우리 반려견 입양할래?”

그녀는 심사숙고한 뒤 승낙했죠. 그들은 개를 입양하면 누가 얼마만큼 책임지느냐부터 헤어지면 누가 데리고 가느냐까지 고민에 고민을 나누었어요. 자연스럽게 닫혔던 대화의 문이 열렸고요. 남자친구도 다시 좋아졌어요. 다정하게 계약서와 계획서를 작성했어요. 계약서에는, 만약 그들이 헤어지면 남자친구가 개를 책임지고 데려가기로 썼지요. 그런 후 계획서대로 유기견보호소에서 개를 입양했는데, 그 개가 바로 오레였어요. 

요즘 오레 엄마에게 큰 문제가 생겼대요. 그건 남자친구보다 반려견 오레를 더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었어요. 남자친구와는 헤어지더라도 오레와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요. 곰곰 고민 끝에 그녀는 계약서 조항을 손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요?”

“만약 우리 둘이 헤어지게 되면 반려견 오레는 내 소유이자 내 책임이다, 라고요.”    

  

“나는 곧 결혼할 예정이에요.”

치와와 엄마가 말했어요. 결혼할 때 치와와를 데리고 간다고 하네요. 다행히 그녀의 남자친구는 치와와와 잘 지낸대요. 

“자녀 계획은 있고요?”

“두 명 생각하고 있어요.”

“양가 부모님들이 좋아하겠어요.”

치와와 엄마가 살포시 웃었어요.

“계획은 일단 그런데, 경력 단절 때문에 사실 좀 고민돼요.”

“프리랜스니까 걱정을 덜 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요, 프리랜스라서 더 치열해요. 쪼금만 손 놓고 있으면 금방 다른 사람이 차지해 버리니까요. 감도 떨어지고요.”

“자녀 계획이 바뀔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자식보다 제가 우선이니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무도 ‘자식보다 자신이 우선’이라는 치와와 엄마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았어요. MZ세대 개엄마들뿐만 아니라, 사람 자식을 둘 키우고 있는 봄이 엄마도, 보슬이 엄마도, 구름이 엄마도요.

     

하루는 잔디밭 옆 그늘막 아래에 모이는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요즘 젊은것들은 애는 안 키우고 개만 키우고 살대.”

“애만 안 키우기로? 결혼도 안 하더라.”

“개를 자식처럼 안고 업고 개모차에 싣고 다니잖아. 개가 자식보다 좋을까? 우리는 그런 게 이해가 안 된다.”

“돈 벌어서 자식한테 안 쓰고 개한테 쓰니, 세상이 참~~~ 나.”

집집이 자녀가 서너 명인 시대를 사셨던 어르신들은 반려동물 인구 1,400만 시대의 풍속도가 서름서름한 듯했습니다.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 0.65명,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유모차보다 개모차가 더 많이 팔리는, 이런 그림이요. 

시간이 흘러 MZ세대 개엄마들이 가고, 남아있는 개엄마들이 말했습니다. 

“사실, 개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보다 백 배 낫다.”

“백 배만? 만 배로 낫지. 늙어서는 남편보다 반려견이지. 자식들은 나가버리면 그뿐이고.”

“우리는 우리끼리 재미지게 살자아~.”

늦중년을 바라보며 초중년에 서 있는 엄마들이 반려견을 향해 까르르 웃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반려견이 한낱 동물이 아닌 듯이 보였습니다. 인생 돛대로 보였습니다. 같은 배를 타고 같은 섬을 바라보며 항해해 가는 짝지요. 

며칠 뒤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는 남편과 마음이 맞지 않아 자녀들을 결혼시켜 놓고 나면 졸혼해야겠다고 말하면서, 그러고 나면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죠. 저는 시대 맞춤형 조언을 건넸습니다. 

“반려견 키워라. 요새는 남자보다 반려견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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