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인 Mar 06. 2024

4화  개털과 아버지

솔이는 배냇털갈이 중입니다. 털이 하도 하도 날려서 알아보니, 생후 3~4개월이 되면 강아지는 견생 첫 털갈이를 한다네요. 덕택에 저는 인생 첫 털폭탄을 경험했습니다. 저 조그만 몸뚱이에서 떨어지는 털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까지 경험한 털은 털갈이로 경험한 털에 비하면 앙증맞은 애교였습니다. 저는 이제야 이해했어요, 왜 많은 보호자가 강아지 털을 바짝 깎아버리는지. 

수의사가 말했습니다.

“절~대로 털 깎지 마세요. 털은 눈에 보이는 게 훨~씬 나아요. 왜 나은지 설명을 잘 들어보세요. 눈에 보이는 털은 우리 코에서 다 걸러져요. 눈에 안 보이는 털은 우리 코에서 걸러지지 않고 콧속으로 빨려 들어가죠. 그럼, 그 털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계속 숨을 쉬니까 기도를 통해 허파로 들어가겠죠. 보호자들은 편하다고 털을 바짝 깎아버리는데, 솔이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눈에는 안 보여도 떨어질 건 다 떨어져요. 오히려 건강에 안 좋아요. 행복하게 살려고 반려견을 입양했는데 반려견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면, 그게 행복이겠어요?”

진중한 눈빛의 수의사 말이 저는 구구절절 옳게 들렸습니다.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약속까지 찰지게 했습니다.

“절~대로 안 깎을게요.”

하지만 집 안 곳곳에 솔가리처럼 소복소복 쌓여 있는 개털들! 그때는 개털이 이만큼 떨어지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돌돌이를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헉, 그런데 너무 많아요.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놈들만 잡아도 수두룩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놈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는 친구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살아. 같이 살다 보면 내 옷에만 붙는 게 아니라 내 입으로 들어오기도 하겠지.”

“뭐, 입으로?”

그 뒤로 싱크대만은 끝까지 사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싱크대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음식에 섞여서 들어오는 개털은 절대로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눈에 불을 켜고 싱크대를 살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싱크대 위에 떡하니 올라앉아 있는 개털을요. 그 순간 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저를 남편의 개딸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두고 있던 원망이 수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되었다고. 왜 쳐다봐? 할 말 있어?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해. 이제 싱크대까지 올라온 네 털을 어쩔 거냐고?”

남편의 개딸이 저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까끌까끌한 혀로 제 발을 핥았습니다. 화내지 말고 진정하라는 뜻일까요?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밥때가 되었으니 밥 하러 일어나라는 뜻일까요? 

그 모습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던 저는 아마도 세 번째가 정답이리라 추측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더 치밀어 올랐습니다. 발을 뒤로 빼고 방으로 가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밥 할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이 마당에 밥이 무슨 소용입니까? 어차피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텐데요. 

마침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그 스트레스를 쏟아냈습니다. 남편은 두 손으로 개딸의 두 귀를 막았습니다. 제가 입을 다물자 그제야 남편은 개딸의 귀에서 손을 뗐습니다. 

“솔이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뭐라 하지 마라.”

“그럼 나는?”

“2개월만 참아라.”

아직도 2개월이나 남았다니요! 그 2개월이 마치 겁처럼 느껴졌습니다. 겁이란 불교의 시간 속에 놓인 가로·세로·높이 1 유순 바위가, 1백 년마다 한 번씩 비단옷자락으로 닦아서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그 바위가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금방 추운 겨울이 가고 화사한 봄이 웃으며 올 줄 알았는데 그 봄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누가 닭 모가지를 비틀 듯이 봄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렸으면, 어떡하지요?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개를 차에 태워 친정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싱크대는 개털로부터 자유로워지겠죠? 대신 자동차 안을 개털이 점령했습니다. 시트고 오디오고 문이고 어디고 개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바람에 우 일어났다가 창문을 닫으면 다른 자리로 옮겨가서 달라붙었습니다. 이놈들을 쫓아내는 방법은 돌돌이뿐입니다. 돌아와서 돌돌이로 너희들을 몽땅 체포하리라 선포합니다. 

거기다 친정으로 가는 길엔 걱정이 두 개나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찾아와 밥 달라고 에옹에옹 우는 노랑점박이를 보기만 하면 쫓아 내버립니다. 어머니가 몰래 주는 생선 뼈를 발견했다 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노랑점박이의 밥그릇을 지팡이로 엎어버리고요. 어차피 버리는 생선 뼈를 좀 주면 어때서 그럴까요? 남동생은 그런 아버지가 참 야박하다고 말합니다. 

다행히 솔이는 고양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고양이를 닮았습니다. 아버지가 오해하기 딱 좋게 집을 찾아와 에옹에옹 우는 노랑점박이를 닮았죠. 한 번은 녹지공원에서 정장을 빼입은 아저씨를 만났는데, 그 아저씨가 솔이를 보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펴길 반복하면서 말했습니다.

“야옹! 야옹! 야옹!”

그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제가 말했습니다.

“얘, 갠데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던 아저씨는 그 후 한마디 말도 없이 부리나케 가버렸어요. 

또 한 번은 놀이터에서 다섯 살·열 살 오누이를 만났는데, 남자아이가 솔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고양이닷! 한 번 만져봐도 돼요?”

누나가 말했어요.

“개야.”

“아니야. 고양이야.”

“아니라니까. 개라니까.”

결국엔 제가 나서서 솔이의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남자아이는 끝까지 고양이라고 우기더군요. 

제 걱정은 바로 아버지가 솔이의 정체성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는 솔이를 보자마자 “요게, 여기가 어디라꼬 들어왔네!”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냅다 발로 차버리겠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최대한 빨리 솔이의 정체성을 알리자, 고 작전을 짰습니다.  

또 다른 걱정은 솔이를 집 안에 들이는 문제였습니다. 개를 키우는 방식이 옛날식인 사람들은 개가 집 안에 있는 것을 무척 싫어하더라고요. 아버지는 옛날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옛날 방식을 고집해서 남동생과 자주 부딪히곤 했죠. 아마 개를 키우는 방식도 옛날 그대로일 테지, 하고 짐작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집 안에 있는 개를 보면 “저게 뭐꼬! 빨리 쫓아내라!” 하실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비한 작전은 아버지가 점심을 드시러 안방에서 나오실 때 솔이를 잠깐 작은 방에 숨겨놓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아버지가 솔이를 못 보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죠.     


친정에 도착해 솔이를 거실 소파 옆에 내려놓고 안방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에게 개를 데려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작전대로 솔이를 끝까지 숨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지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고 싶었습니다. 솔이의 정체성은 솔이의 정체를 들키고 난 뒤에 밝혀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안방에서 나오니, 솔이는 거실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있었어요. 냄새 맡기는 개가 그 공간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알고 있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물컵을 들고 안방에서 나오시네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어요. 왜 미처 생각지 못했을까요? 아버지가 와병 환자는 아니니 물을 마시러 나올 수도 있고, 화장실에 갈 수도 있고, 텃밭에 갈 수도 있는데…. 저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거실을 가로질러 곧장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어쩌면 이대로 모른 채 지나칠까… 했는데,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아버지가 옆을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냄새 맡기 삼매경에 빠져있는 솔이의 뒤태를 아버지가 보고 말았습니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놀라서 우뚝 섰습니다. 저는 튕기듯이 달려가 아버지 앞을 가로막았죠. 아버지가 솔이를 발로 차지 못하도록요.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우리 보고 키우라는 말이가?”

“아뇨.”

저는 대답과 동시에 두 손을 흔들었어요. 이어 귀가 잘 안 들리는 아버지를 위해 큰 소리로 말했죠. 

“김 서방 개! 예요. 개!”

“너 개라?”

저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는 또 물었어요. 

“수컷이가, 암컷이가?”

저는 급하게 휴대전화 메모장을 켜고 ‘암컷’이라고 쓴 후, 아버지 눈앞에 내밀었습니다. 

“허허허.”

엥? 아버지가 웃으시네요! 저는 눈을 깜짝거렸습니다. 근 십 년 동안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세월 아버지의 입은 절망을 말하거나 만성 통증을 신음하기만 했으니까요. 

만성 통증은 아버지의 육체도 갉아먹겠지만 아버지의 정신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마 죽으면 얼매나 좋겠네. 먹고 죽을라고 농약을 사다 놓기는 했지만…. 낮에는 꼼지락거리니까 그래도 좀 나은데 밤이 되면 고마 죽겄다. 입이 바짝바짝 타면서 가슴이 쪼여 들고, 우찌우찌 일어나 약을 먹어도 너무 오래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약이 듣지도 않는다.”

가끔 저는 아버지가 느끼시는 통증의 최대치를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제가 상상할 수 있는 통증의 최대치는 결국 제가 경험한 통증의 범위 내에서겠죠. 제가 경험한 통증의 최대치는 밀가루를 먹고 난 뒤에 느끼는 통증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가 제 몸뚱이를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북어 패듯이 패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아파서, 몸에 숨이 들어오고 나가게 하는 일조차 힘겨웠어요. 

아버지도 그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고 계신 걸까요? 아니면 그보다 더한 통증에 시달리고 계신 걸까요? 어떤 통증이건 지독한 통증을 낮이고 밤이고 달고 사시는 아버지는 오래전에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 웃음 한 조각을 찾았네요. 솔이 덕분에.      


점심을 먹으면서, 저는 솔이를 힐끔거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저 그런 시고르자브종(시골 잡종) 똥개입니다. 특별한 힘을 지닌 마법의 개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법을 부리네요. 통증만이 남은 삭신이 지긋지긋하신 아버지를 웃게 한 마법 말이에요. 웃음은 아버지에게 통증을 낮춰주는 알약과 같으니까요. 

아버지가 소고기를 찢어서 식탁 아래로 던졌습니다. 고개를 숙여서 솔이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맛있나? 더 주까?”

그 말에 솔이가 아버지의 무릎에 발을 올리고 아버지의 무릎을 긁었는데, 그걸 보고 아버지가 또 웃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제 다 먹었다. 네 밥 먹어라. 그래야 배 안 아프다. 알았재?”

아버지가 일어나자, 솔이가 두 발로 서서 콩콩 뛰었습니다. 아버지는 아픈 허리를 굽히고 솔이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죠. 그 순간 오래된 절망이 드리운 아버지의 얼굴이 노을 질 녘처럼 밝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고양이를 하도 미워하길래 나이 들어서까지 와 저렇게 못된 심성 일꼬? 했다. 근데 인제 보니 아니네. 개를 저리 좋아할 줄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저는 돌돌이로 차 안의 개털을 체포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개를 키우면 어떨까?

그래서 반려견을 데리고 강변 잔디밭으로 산책 나오는 분들께 물어보았죠. 맨 처음에는 미니 푸들 쫑아의 할머니께. 

쫑아 할머니는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서울 어느 병원에 수술 예약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할머니와 다르게 쫑아는 14살(사람 나이 84살)인데 아주 건강하고요. 늘 몸이 아픈 할머니는 아주 건강한 쫑아를 개모차에 싣고 강변을 드라이브해 주지요. 

“젊었을 때는 괜찮았지. 지금은 힘들어. 야는 내가 키워오던 개니까 어쩔 수 없이 키우지만 새로 키우라면 안 키워. 못 키워.”

다음으로 솔이 또래 몰티즈와 산책 나오는 할머니께. 

“아유, 안 돼. 나는 할아버지가 건강하니까 키우지. 할아버지가 하루 세 번씩 청소기로 밀어. 아침 먹고 밀고, 점심 먹고 밀고, 저녁 먹고 밀고.”

“푸들이나 비숑은요? 털이 덜 빠지잖아요.”

“목욕하고 미용실에 데리고 다녀야 하잖아. 산책도 그래. 날마다 데리고 나오기 힘들어. 할아버지가 자주 나오고 나는 가끔씩만 나오잖아.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저는 유모차를 밀면서도 비틀비틀 걸으시는 어머니와 지팡이를 짚고도 다리를 절뚝이시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그럼 안 돼. 개가 일거리야.”

얼결에 반려인이 되고 보니 개가 일거리인 것은 정말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둥이 엄마는 질문에 대한 답을 미루고 사연부터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CCTV로 시골집을 살펴보는데, 삐쩍 마른 개가 시골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개는 시어머니가 키우던 개 둥이였지요. 그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모두가 둥이를 깜빡 잊고 있었던 거였어요. 둥이는 버스정류장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예전에는 늘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면 할머니가 돌아왔으니까요. 

CCTV 속 둥이는 느릿느릿 개집에 들어가더니 부쩍 가늘어진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잠을 청했습니다. 배고플 텐데…, 불쌍해서 마음이 아릿했지만 둥이를 거둘 엄두는 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며 CCTV로 지켜보길 사흘째. 더는 저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음 날 오후 늦게 시골집으로 갔습니다. 어둠이 내리자 둥이가 집으로 돌아왔고 그런 둥이를 쓰다듬는데, 손바닥에서 앙상한 갈비뼈가 우둘투둘 느껴졌습니다. 부드럽고 윤기 흐르던 털은 시든 들풀처럼 푸석거렸고요. 

“아유, 어떡해!” 

서둘러 사료를 내준 뒤, 허겁지겁 먹는 둥이에게 그간의 사정을 짧게 말해주었어요. 

“둥이야, 이제 할머니는 못 오셔. 몸이 아프셔서 병원에 갔는데, 거기서 바로 요양원으로 가셨거든. 앞으로는 나랑 살자, 응?”

둥이 엄마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솔직히 노인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우리 시어머니도 밭에 나가 일을 해서 깨도 나눠주시고 김장배추도 나눠주시고 했는데,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더라고요. 사람이야 아프면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가면 되는데 남겨진 개는 어떡해요? 누가 데려가지 않으면 유기견이 되는 거잖아요. 우리 둥이도 그럴 뻔했고요. 그러니까 나는 안 된다고 봐요.”     


긴 물음의 여행이 끝났습니다. 아버지가 개를 키우는 건 무리라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반려견을 키우면 노인의 치매 위험률이 40% 감소한다는 말이 있지만, 독일에서는 노인들이 개를 키우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하네요. 

남은 방법은 솔이를 데리고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개털이 자동차 안을 자주 수놓을 테죠. 부모님 집도 마찬가지고요. 그날은 청소를 몇 번이나 해야 할지요….

그래도 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더 웃을 수 있다면 개털이 문제겠습니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버지께는 죄송하나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개털은 지금도 저를 충분히 괴롭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괴롭힌다면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어질 것입니다. 개털이 아니라 개한테서요. 

저는 개털 앞에서 얄팍해진 제 효심의 두께를 착잡하게 바라봅니다. 

그래도 샅샅이 뒤져보면, 아버지를 위해서 개털을 참을 효심이 제 몸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효심을 찾아낼 그날을 고대해 봅니다.      

이전 03화 3화 오빠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