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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 Feb 21. 2024

2화  3개월의 시한부 동거

일요일 오후입니다. 남편과 함께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언제나 둘이 다녔는데 이제는 강아지까지 셋이네요.

비탈진 언덕에서 바라다보니 겨울 햇살이 강물의 등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무엇이 즐거운지 햇살은 반짝이는 웃음소리를 울근불근한 강물의 등살에 뿌리고 있었고요. 바로 옆에서는 강아지가 겁먹은 표정을 아빠의 가슴에 묻고 있었습니다. 그런 강아지에게 남편은 연신 속삭였지요.

“저기 봐. 노란 잔디가 폭신해 보이지?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거야. 넘어지면 아빠가 호~ 해 줄게.”

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겁먹은 거겠지. 넘어질까 봐 겁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걸음마 배우는 애기도 아니고 개잖아.”

“우리 솔이 사람들이 많아서 겁먹었어? 걱정하지 마. 아빠 믿지? 아빠 힘 세. 무서운 아저씨가 와도 사나운 로트와일러가 와도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놀아도 돼. 응? 알았다고? 아고고, 우리 솔이 예뻐라.”

남편의 목소리는 잔물결을 타고 노는 햇살 같았습니다. 제 마음은 강바닥 같았고요. 꽤 발랄한 햇살이 타고 노는 저 물결 아래 아래에 있는 침침한 그곳 말이에요.      

지난밤에 저는 지난 몇 개월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꼼꼼히 회상해 보니 남편이 강아지를 입양해 올 조짐이 영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이 강변으로 산책 나올 때마다 남편은 어릴 적에 키우던 개 ‘메리’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수백 번은 들었을 거예요. 남편은 늘 감흥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의 끝은 항상 다짐으로 끝났지요.

“꼭 진돗개를 키워야지.”

그러면 저는 한쪽 눈을 치떴고, 남편은 한 박자 느리게 덧붙였습니다.

“주택에 살면.”

저는 침묵으로 그 말을 들어 넘겼습니다. ‘주택에 살면’이라는 가정은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가정이니까요. 꼭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고요. 실현 확률이 낮은 불확실함을 두고 다투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지요.

이 외에도 조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남편은 메리 이야기를 하지 않고 대신 외국인 직원이 키우는 개 ‘소주’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이 주로 했던 이야기는 소주에게서 받은 섭섭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놈의 개자식이 불렀더니 간식만 날름 받아먹고 가버린다나요. 그래서 끝까지 따라가서 잡아다가 혼쭐을 냈다나요. 다음 날엔 간식도 안 먹고 꼬리를 말고 구석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더라네요. 그것 또한 자기를 개무시하는 것 같아 섭섭하더라네요. 저는 남편이 날마다 집으로 데리고 오는 개 이야기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만 듣고 싶었습니다.

“이제부터 개 이야기 금지야. 귀에 멍이 들었어.”

그 뒤로 남편은 산책하는 내내 침묵했습니다. 남편에겐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듯했습니다. 개 이야기를 하거나 말문을 닫거나. 차라리 제 귀에 멍이 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귀에 멍이 들다 보면 못이 박이게 되고 둔감해질 테니까요. 저는 개 이야기 금지 명령을 풀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개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로 살아있는 개를.

제 가슴은 후회로 가득 찼습니다. 왜 미리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그랬으면 단단히 단속했을 텐데요. 아닙니다. 제가 이럴 줄 알고 남편은 아예 의논을 차단해 버렸을 겁니다. 다 계획이었겠죠?

저는 의아심 뿜는 실눈으로 남편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강변 잔디밭을 눈으로 훑고 있었습니다. 그중 양털 방석처럼 폭신한 곳을 골라 강아지를 살포시 내려놓았습니다. 강아지는 처음 보는 노란 땅이 신기한지 휘휘 둘러보다가 곧 냄새를 맡으며 뽈뽈뽈 걸어 다녔습니다.

그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말했습니다.

“어머나, 강아지가 어린데 늙었어! 이마에 주름살 좀 봐!”

같이 가던 일행이 걸음을 멈추고 강아지를 보더니 까르르 웃었습니다. 그러고 가버렸지요.

저는 풋 웃었는데, 남편은 시멘트 같은 얼굴로 여자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습니다.

“내 딸이 어디가 늙었어! 예쁘기만 하건만!”

“이마를 찌푸리면 주름이 생기는 건 사실이잖아.”

“그래도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 남의 딸한테! 지보고 젊은데 늙었다고 하면 지는 기분 좋겠어?”

그 말이 이렇게나 화를 낼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개딸한테 죽고 못 사는 남편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렇네.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저 여자가 잘못했네. 듣는 사람, 상처받게.”

그제야 마음을 추스른 남편이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여동생을 만났는데 여동생이 강아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애가 못생겼네. 좀 예쁜 애를 데려오지. 털이 뽀송뽀송한 포메라든가 푸들이 같은 애로.” 남편은 그 말이 생채기가 되어 마음을 할퀴더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앞으로, 절대로, 어떤 반려견에게도 ‘늙었다, 못생겼다’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요. 제 눈에 아무리 못 생기고 아무리 안 예뻐도 그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예쁜 반려견이니까. 말은 안 해도 속으로 깊이 상처받을 거라고요.

솔직히 저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개잖아요. 그것도 잡종 개. 그런데 그 말이 생채기가 되고 상처가 될까요? 감정에 과장이 섞였으리라 짐작한 저는 의혹을 품고 물었습니다.

“진짜로 상처받았나 봐?”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러고 남편은 쭈그리고 앉더니 개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습니다.

“솔이야, 보톡스 맞을래? 주름살 펴야지?”

“귀도 펴지면 안 된다며? 귀 접기 수술도 같이 해 주지 왜?”

어제부터 남편은 귀가 쫑긋 선 것보다 접힌 게 훨씬 착해 보인다며 개딸의 귀를 쓰다듬으며 “펴지지 마라, 펴지지 마라”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거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의 노래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솔이 친아빠는 귀가 접혔는데 솔이 친엄마는 귀가 쫑긋 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솔이의 오빠 소주는 한쪽 귀는 쫑긋 섰고 한쪽 귀는 반으로 접혔고요.

“말만 해라, 솔이야. 너의 미모를 위해서 이 아빠가 뭔들 못 해 줄까!”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있었고 강아지는 식탁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남편의 손이 끊임없이 식탁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저는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주니까 사료를 안 먹잖아. 그만 줘. 애 입만 까다롭게 만들어.”

“귀하게 크는 딸은 입이 좀 까다로워도 돼.”

저녁을 먹고 나서 남편이 욕실에 들어갔습니다. 강아지는 욕실 문 앞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잠깐 기다렸는데 나오지 않으니까 낑낑댔습니다. 낑낑대다가 드러누웠습니다. 몹시도 낙심한 표정이었습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한 꺼풀씩 더하는 듯 까만 눈동자가 촉촉했습니다. 파릇파릇 살아 숨 쉬던 생의 의욕이 등줄기 속으로 숨어버린 듯 어깨가 축 늘어졌습니다.

잠시 후 남편이 욕실에서 나왔습니다.

발딱 일어난 강아지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네 발이 빠르게 탭댄스를 추었습니다. 그 리듬에 맞춰 활처럼 휜 몸이 흔들렸습니다. 입이 “낑낑낑” 소리를 내었습니다. 앞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잠깐 못 본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랜 시간 헤어졌다가 만난 사이 같았습니다. 남편이 딸기 맛 나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 그래. 아빠 왔어, 아빠 왔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아지가 탭댄스를 멈췄습니다. 그래도 털끝마다 기쁨이 빨간 망개나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습니다. 남편이 강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등을 쓰다듬었습니다. 벅찬 기쁨을 눈망울에 호수처럼 담고 있던 강아지가 껑충 뛰어올라 남편의 입술에 뽀를 했습니다. 껄껄껄, 남편이 크게 웃었습니다.

“아빠 좋아? 아빠도 좋아. 사랑해.”

그들의 행복한 밤은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저는 까만 고민의 밤을 열었습니다. 이러고 계속 강아지와 살아야 할까요? 생각이 깊어질수록 답은 안 나오고 목만 탔습니다. 물을 마시러 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거 똥 아니에요? 마루에 깔린 배변 패드에 있는 이것요.

“으악, 똥!”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예뻐라!”

순간 남편과 저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너 말고 솔이가.”

저는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대꾸하면 치졸해질 것 같았습니다. 침묵은 제 자존심이었습니다.     

다음 날 월요일이 되어 남편은 강아지를 품에 품고 일하러 나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다시 강아지를 품에 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강아지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뒹굴었기 때문에 목욕해야 했습니다. 욕실에서 나온 강아지는 몸을 덜덜 떨었습니다. 남편이 서둘러 드라이기로 털을 말렸습니다. 털이 온 집 안에 날렸습니다. 아침에 남편과 강아지가 나가자마자 탈탈 털고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박박 물걸레로 닦은 집이 한순간에 개털 집이 되고 있었어요. 스트레스가 머리 꼭대기에서 연기로 치솟는 것을 저는 꾹 눌렀습니다.

강아지는 털을 바싹 말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을 덜덜 떨었습니다. 남편이 제 무릎담요를 가져다가 강아지를 돌돌 말아서 안았습니다. 그래도 강아지는 떨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강아지는 지쳐서 잠들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강아지는 날마다 목욕하면 안 되는데.”

이 말은 강아지를 집에 두고 가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그 뒤로도 밤마다 행해지는 강아지의 목욕은 어느 수도승의 고행 같았습니다. 남편은 덜덜 떠는 강아지가 안쓰럽지 않냐는 불쏘시개 말로 제 마음을 들쑤셨고요. 그때마다 저는 찬물 표정으로 홱 돌아섰습니다.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받아주면 강아지의 고행이 저의 고행이 될 테니까요. 개똥은요? 개털은요?

그렇다 보니 편안해야 할 밤이 전혀 편안하지가 않았습니다.

‘안 돼! 좋아하지도 않는 동물과 어떻게 살려고 그래?’

마음이 이렇게 말하면 다른 마음이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이미 블로그도 찾아보고 유튜브도 찾아보면서 하나씩 배워가고 있잖아. 석 달만 참으면 모든 게 원상복구 될 텐데 밤마다 강아지를 덜덜 떨게 할 거야?’

그러나 석 달은 열흘이 아닙니다. 석 달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고비를 아흔 번 넘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고비가 하루에 한 번이라고 어림쳤을 때 그렇다는 얘기지요. 감당키 어려워 보이는 이 시간 앞에서 저는 안쓰러운 마음을 심장 뒤에 꼭꼭 숨겨놓습니다.      

다음 날, 남편이 말했습니다.

“동물등록 좀 해주라. 바빠서 갈 틈이 없네.”

“내가?”

“딱 하루만. 부탁할게.”

“설마 얘가 날 잡아먹지는 않겠지?”

“나는 네가 얠 잡아먹을까 걱정인데?”

저는 강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강아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맑고 순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딱 하루인데 뭔 일 있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승낙했습니다. 남편은 최대한 일찍 오기로 약속했지요.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강아지가 절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똥오줌으로요. 순식간에 저의 안락한 집이 강아지의 똥오줌으로 점령되기 시작했습니다. 강아지의 눈에는 집의 모든 공간이 자기 변기로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배변 패드가 깔린 곳과 안 깔린 곳, 마룻바닥과 카펫을 구분하지 못했어요. 저는 모든 카펫을 걷어치웠습니다. 온 곳에 배변패드를 깔았습니다. 저는 거미처럼 벽에 바짝 붙어서 다녔습니다.

또 개털이 공간을 점령했지요. 남편의 개딸은 단모종인데 그 자잘한 털이 마치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 먼지 같았습니다.

남편이 전화했을 때 저는 소리쳤습니다.

“집이 똥밭과 털밭이 되고 말았어!”     

지친 마음으로 오후에 동물등록을 하러 나섰습니다. 건널목을 건너는데 마주 오던 젊은 남자가 강아지를 보고 말했습니다.

“와, 개예쁘다.”

참 이상하죠? 그 말이 제 가슴을 뿌듯하게 했습니다. 새 힘이 났습니다. 저는 미소와 함께 동물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이 개는 내 개가 아니에요. 남편 개예요. 남편 이름으로 동물등록을 해 주세요.”

접수인이 물었습니다.

“아이 이름이 뭐예요?”

저는 당황해서 되물었습니다.

“아이요? 우리 아들은 왜요?”

“아니, 강아지요.”

“아, 강아지. 솔이예요. 솔, 이.”

“생일은요?”

“3개월이 되려면 며칠 남았으니까….”

“정확한 날짜는 모르세요?”

“남편에게 전화해서 물어볼…아, 기억났어요.”

저는 생일을 말해주었습니다. 접수인이 또 물었습니다.

“왕자예요, 공주예요?”

“네?”

저는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마치 외계어를 들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접수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남자예요, 여자예요?”

남자? 여자? 속으로 두세 번 되뇌고 나서야 저는 그 말이 강아지가 암컷이냐, 수컷이냐를 묻는 말임을 깨달았습니다.

“아, 여자요.”

“종은요?”

“종? 무슨 종?”

“강아지가 무슨 종류냐고요.”

“아아, 잡종 똥개요.”

“믹스견이요.”

“오, 믹스견! 그런데 이런 것이 왜 필요해요?”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찾으려면 필요하죠.”

“잃어버리기도 해요?”

“그럼요. 등록해 놓으면 빨리 찾을 수 있어요.”

큰 깨달음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동물등록이라는 것이 유기견을 예방하기 위한 법적 조치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개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서도 동물등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모르는 세상에 놀라운 변화까지 일어나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개들이 아이로 불리고 언제부터 암컷과 수컷에서 공주와 왕자로 등극한 걸까요?

동물등록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제 강아지는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남편의 개딸이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남편은 강아지의 개아빠가 되었고요. 그러면 저는 강아지에게 무엇일까요? 모르는 아줌마는 아닐 테고 도우미 아줌마?      

우리는 동물병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들어갈 때와 기분이 달랐습니다. 뭔지는 모르나 어깨에 무언가 묵직하게 얹힌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저는 동물병원 옆 카페테라스에 걸터앉았습니다. 남편의 개딸은 제 발 앞에 앉아서 제가 보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바라보는 그곳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동그란 모양을 그리며 건물 뒤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는데 마치 파란 가슴을 벌려 우리를 안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빛의 산란이 만들어낸 고요한 하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저는 요즘 저의 화두인 이십오 년 전 스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대주(남편)한테는 자식이 둘인데 보살(나)한테는 자식이 하나야.” 순간 저는 제 어깨에 얹힌 묵직한 무언가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바로 책임감이었습니다. 이 어린 생명체가 법적으로 남편의 개딸이 되었다는 데서 오는 책임감. 이십오 년 전 “키워야 한다면 키워야죠”라고 내뱉은 제 말에 대한 책임감.

저는 어린 생명체를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우리 인연이니?”

그러고 강아지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강아지가 까만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저는 처음으로 강아지가 ‘개예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강아지가 목을 쭉 빼 올리더니 혀끝으로 제 입술을 핥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남편과 강아지가 뽀를 할 때 징그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아지의 혀는 촉촉하고 따뜻했습니다. 부드럽고 달큼하고 오묘했습니다. 그 느낌이 가느다란 무명실처럼 스멀스멀 가슴속으로 기어들어 와 심장을 휘감았습니다. 단단하게 타래로 뭉쳐있던 심장이 사르르 풀어졌습니다.

제가 놀라서 일어서자 강아지가 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눈에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던 처음 그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이 신뢰를 제가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바로 그 순간, 제 손이 강아지의 빨간색 목줄을 잡고 있었는데 그 빨간색 목줄이 저와 강아지를 잇는 핏줄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탄식했습니다.

“인연이구나!”

끝이 났습니다. 저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3개월 시한부 동거를 받아들이기로요. 운명에 살짝 순응하기로요. 남편의 개딸을 돌보는 임시보호자가 되어 보기로요.

마음이 고요했습니다. 빛의 산란이 만들어낸 저 파란 하늘처럼….

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책임감 있는 목소리로 솔이에게 말했습니다.

“가자, 우리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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