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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 Feb 14. 2024

1화 남편의 늦둥이 딸

느지막이 딸을 얻으면 저렇게 예쁠까요? 늦둥이 딸을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을 저는 짐작해 봅니다. 그러나 짐작이 어렵네요. 제가 아빠가 아니라서 그럴까요? 가슴에 담긴 사랑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제 딸이 아니라 남편의 딸이라서 그런 걸까요?

남편은 데리고 들어온 딸한테 푹 빠졌습니다.

“어구구, 내 딸. 아빠 기다렸어?”

나긋나긋하다 못해 죽처럼 푹 퍼진 목소리. 이 목소리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키울 때도 나오지 않던 목소리입니다. 삼십 년을 같이 산 저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입니다. 고소하고 부드러워서 씹지 않아도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깨죽 같은 목소리입니다. 세상에, 남편의 목구멍 어디에 저런 목소리가 숨겨져 있었을까요?     

그 모습을 보자 스님의 말씀이 또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말씀인데, 불현듯 떠오른 그 말씀이 귀에 자꾸 들리는 건 저도 모르게 어떤 아찔함을 직감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십오 년 전, 저는 어머니와 새해를 맞이한 기념으로 그해 신수를 보러 갔습니다. 스님이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서 사주를 풀다가 갑자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살(나)은 자식을 하나 더 낳아야겠네?”

“예?”

순간 놀라서 멈칫했던 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싫어요.”

저는 이런 말씀을 참 많이도 들어왔습니다. 당시 시댁 어른들은 자식 둘 낳는 것을 너무 당연시하며 저를 만날 때마다 그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나 저는 자식을 하나 더 낳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 있는 자식도 시댁에 맡겨둔 판에 ‘하나 더’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습니다. 시댁은 저의 집에서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있었고 저는 주말마다 아들을 보러 시댁에 가야 했습니다. 물론 아들을 보는 건 행복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시댁에 들어서는 순간 엄마보다 며느리라는 신분이 급부상했습니다. 저는 엄마에 걸맞은 아들 돌보기보다 며느리에 걸맞은 시댁의 잡다한 집안일을 해야 했지요.

매주 그러다 보니 저의 어깨엔 풀리지 않는 피로가 묵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 무게에 짓눌린 저는 다른 워킹맘들과 똑같이 하루하루 봄의 고드름처럼 삶에 위태롭게 매달려 살았습니다. 만약 유체이탈이 가능하다면 제 몸에서 빠져나가 초겨울 곰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한 계절 동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를 스님이 달랬습니다.

“그러지 말고 하나 더 낳아.”

결국엔 스님도 똑같았습니다. 시댁 어른들이 그러하듯이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도롱이 같은 제 심정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야는 일을 해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늘 어머니는 제 편이었죠. 저에게 “너는 일을 하니까 자식을 하나만 낳아라”라고 일러왔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말씀이 든든하고 고마웠는데 스님은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나무랐습니다.

“일이 중요해? 이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하나 더 낳으라고 해.”

“그라믄 야가 너무 힘들어서 안 돼요.”

“보살님(어머니) 하는 말이 다 딸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거 아는데, 진짜 딸을 위하려면 하나 더 낳으라고 해야 해. 내 말 들어.”

“스님이 자꾸 하나 더 낳으라고 하는 걸 보면, 까닭이 있을 테지요? 와 자꾸 그라는데요?”

“사주를 보면, 대주(남편)한테는 자식이 둘인데 보살(나)한테는 자식이 하나야.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보살(나)이 자식을 하나 더 안 낳으면 대주(남편)가 밖에서 데리고 온다는 뜻이야.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사주팔자 못 속인다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하나 더 낳으라고 잘 타일러.”

제 머릿속에서 벼락이 꽝! 꽝! 쳤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밖에서 낳은 자식을 데리고 들어온다니요? 저는 입을 아, 벌린 채로 스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스님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밖에서 데리고 들어와도 괜찮겠어?”

저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핥고 한숨을 쉰 뒤 간신히 말했습니다.

“아… 니요.”

보란 듯이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나 더 낳아야겠지? 그러니까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하지 말고 하나 더 낳도록.”

“그건…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이혼해야죠.”

“대주(남편)하고 보살(나)은 헤어져도 다시 만날 인연이야. 끊어질 인연이 아니야. 그러니까 안 낳으면 키우는 수밖에 없어. 그러고 살 수 있겠어?”

그 말에 제 가슴은 무너졌고 숨이 꽉 막혔습니다. 저는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습니다.

“키워야 한다면… 키워야죠.”

스님은 생각 깊은 눈으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손사래 치며 말했습니다.

“우리 김 서방이 그런 사람 아이거마.”

스님이 쐐기 박듯이 한마디 했습니다.

“두고 봐. 사주팔자 못 속인다니까.”

집으로 돌아온 저는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평소 신수를 미신으로 치부하는 남편은 그 이야기 또한 한낱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정한 대로 살았고 삶의 방향키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남편이 진짜로 딸을 하나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잊었던 스님의 말씀이 별안간 떠올랐죠. 당시 스님은 제 사주에서 이 얄궂은 사건 한 줄을 읽어냈던 걸까요? 저는 지금 스님의 말씀을 거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까요?

그날은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날이었습니다. 날카롭게 손톱을 세운 바람이 종일 하늘과 땅과 나무를 긁어대는 날이었죠. 창문은 괴롭혀 덜컹덜컹 거친 숨소리를 냈습니다. 그 거친 숨소리는 저를 데리고 과거의 시간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저는 어릴 적 시간 속에 불시착했습니다. 워킹맘으로 일할 때는 전혀 가볼 수 없는 시간이었는데, 일을 쉬면서 주부로 사니 이렇듯 아주 사소한 것에 이끌려서 종종 까마득히 잊었던 시간 속을 날았고 저는 그 시간 속에 잠깐잠깐 머물러 있곤 했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저는 추억 속에 마음을 푹 담갔습니다.

추억 속의 시간은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산타할머니라 부르면서 어머니를 조르고 있었습니다. 석가탄신일마다 절에 시주하시는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는 우리 다섯 형제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빨갛고 따스한 이름에 들뜬 우리에게 소소한 과자 파티를 선물해 주셨지요. 새까만 연탄이 달구는 따스한 방 안에서 우리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바삭바삭 과자를 먹으며 소곤소곤 귀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더해갈수록 무서움이 주황빛 연탄불로 달구어지는 방 안의 온도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악! 무서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우리는 앞다투어 이불을 머리에 둘러썼습니다. 그것은 곧 이불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이불 싸움은 또 베개 싸움으로 번졌지요. 우리의 웃음소리는 연탄불에 올려놓은 밤톨처럼 톡톡톡톡 튀었습니다. 그때도 창밖에는 바람이 까만 밤을 윙윙 갈구고 있었죠.

추억에 무자맥질하던 제 마음에 미소가 그려졌습니다. 물질의 눈으로 보면 그때는 방도 물건도 모든 것이 부족했던 때였는데 추억의 눈으로 보니 그때가 행복했습니다. 방은 비좁았어도 마음은 비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온몸에 찬 바람을 묻히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저에게 가슴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게 뭐게?”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고 있는 남편의 가슴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미리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일까, 저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뭐야?”

“보면 아마 깜짝 놀랄걸?”

저는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남편은 품에 든 것을 쉽사리 꺼내 놓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뭐길래? 궁금증이 꽈리 열매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재촉하는 저의 눈 깜박임에 남편이 결심한 듯 품 안의 것을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남편이 꺼내 든 것은 조그마한 강아지 인형이었습니다. 인형 선물은 연애할 때나 포근포근 설레지 결혼을 하고 현실에 직면하니까 귀찮은 선물 1위였습니다. 2위는 꽃바구니고요. 결국엔 일거리에 쓰레기니까요. 그런데 또 인형이라니요? 저는 입술을 비틀었습니다.

“만져 봐. 따뜻해.”

따뜻해? 남편의 말에 저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살아있어?”

“살아있지. 만져 봐.”

“싫어.”

“안 물어.”

“싫어.”

저는 재빨리 손을 뒤로 숨기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손에 들고 있던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마룻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보던 강아지를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강아지는 훨씬 더 조그맣게 보였습니다. 살짝 쥔 제 주먹보다 조금 더 클까…?

강아지의 등에는 조롱박을 길이대로 잘라 엎어놓은 것 같은 갈색 무늬가 있었습니다. 달리 보면 커다란 물방울 두 개를 붙인 모양 같기도 했습니다. 무늬를 뺀 몸 색깔은 모두 흰색이었는데 머리 색깔은 갈색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흰색 털과 갈색 무늬가 조화롭게 어울렸고 그것 때문에 고양이같이도 보였습니다.

어쨌거나 강아지 인형이 아니라 살아있는 강아지잖아요? 저는 두려운 눈으로 강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강아지도 두려운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개란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는 저처럼 강아지도 사람이란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는 걸까요? 낯선 사람, 낯선 공간같이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거실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강아지를 두려워하는 저와 저를 두려워하는 강아지 사이의 침묵. 침묵 속에서 우리는 눈꺼풀을 쉴 새 없이 깜박거렸습니다. 태연한 건 남편뿐이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예쁘지?”

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물었죠.

“똥도 싸?”

그것은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하지.”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때부터 제 눈은 불안하게 강아지를 따라다녔습니다. 언제 똥을 쌀지, 어디에 똥을 쌀지, 그리고 어떻게 치워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똥 싸면 어떡해!”

“가방에 배변 패드 있어.”

아. 저는 숨을 골랐습니다. 배변 패드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아기 기저귀 같은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저는 똥 기저귀를 별로 갈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키우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겠지만 시댁에는 저 말고도 손이 많았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아빠, 고모의 손. 그러므로 굳이 제 손으로 6대 장손의 똥을 치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가 치워?”

“내가 치우지.”

그 말에 일단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러자 개가 우리 집에 왜 왔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누구 개야? 왜 데리고 왔어?”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뭐? 나한테 개를? 나는 개 싫어하는데?”

“너한테 주는 선물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야.”

뭐라고? 이게 말이야, 콩이야? 저는 눈을 희번덕거렸습니다.

“어디서 키우려고?”

“하우스에서. 봄 될 때까지만 집에서 키우자, 밖이 너무 추워서. 봄 되면 데려갈게. 딱 석 달이야. 석 달 금방 가. 나중에 정들어서 데려가지 마라, 하면서 울지 마라.”

하우스는 남편이 농사짓는 비닐하우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개를 많이 키우긴 하지요. 그래도 그렇죠! 강아지를 분양받겠다는 말 한마디 없었고 입양 계획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갑자기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석 달만 참으라니요! 동물을 좋아하지 않고 강아지를 키우는 일은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저한테요! 강아지가 눌 똥과 오줌은 생각만으로도 역겹고 상상만으로도 토가 올라왔습니다.

그 와중에 아들까지 제 아빠 편을 들고 나섰습니다.

“이 추운 날 비닐하우스에서 재우면 얘 죽어. 겨우 석 달이라잖아. 석 달만 참자, 엄마.”

동물이라면 질색하던 아들이 강아지가 귀엽다며 휴대전화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강아지를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기가 찼습니다.

남편이 온 집안에 배변 패드를 깔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사람을 위한 집이 아니라 강아지를 위한 집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강아지 훈련 시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앉아, 엎드려, 돌아, 기다려, 먹어. 강아지가 한 가지씩 해낼 때마다 칭찬이 늘어지고 간식이 보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도 있나요?

“뽀!”

강아지는 혓바닥을 내밀어 뾰족하게 내민 남편의 입술을 살짝 핥았습니다.

“옳지, 우리 솔이 잘했어~.”

남편이 환하게 웃으며 간식으로 보상하고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러고 저에게 자랑했습니다.

“봤나? 내 딸 천재지?”

“따아알?”

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암컷이니까 당연히 딸이지.”

“개잖아.”

“개가 뭐? 내 딸이야, 내 딸. 막내딸. 늦둥이 딸. 그러니까 구박하지 마라. 내가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개 하고 뽀뽀를 다 하다니요? 개를 막내딸이라고 하다니요? 저를 데리고 들어온 딸을 구박하는 계모 취급하다니요? 저는 새우 눈을 하고 알콩달콩한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다 자는 밤입니다. 남편은 강아지를 품고 거실에서 자고 있습니다. 저는 홀로 깨어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처럼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딸을 키워야 하는 것이 제 운명일까, 하는 생각을 끝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키워야 한다면 키워야죠.” 이십오 년 전의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저의 가슴에 콱 박힌 느낌입니다.

우연과 운명은 깻잎 한 장 차이입니다.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눈 한 번 깜박이는 찰나에 우연이 운명으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많은 시간을 돌이켜보면 지금 운명으로 받아들인 모든 것들은 우연이 운명으로 바뀐 순간이 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은 짧은 찰나에 운명이 되었을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우연이 겹치고 겹친 후에야 비로소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연 속에는 운명의 싹이 들어 있습니다. 우연은 운명의 씨앗입니다. 모든 씨앗이 알맞은 환경을 만나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이 우연도 알맞은 환경을 만나면 인연의 싹을 틔우고 운명의 꽃을 피웁니다. 순식간에 운명의 꽃을 피울 수도 있고 수천 년 후에야 운명의 꽃을 피울 수도 있죠.

저는 이 인연이 우연에서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길 빌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우연이 인연의 싹을 틔울 수 없게 운명의 꽃을 피울 수 없게 메마른 사막을 펼치고 싶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마음이 며칠 전에 잠깐 머물렀던 추억 속 그날처럼 따습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방은 그때보다 넓은데 제 마음이 비좁아진 걸까요?

바람은 까만 밤을 할퀴고 생각은 제 마음을 할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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