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9
풉! 커피를 흘렸습니다. 이번 여름을 맞이하여 쇼핑몰에서 소소하게 구매한 반팔티입니다. 저는 이 옷이 좋았습니다. 몇 안 되는 저의 반팔티 중에서도 아마 가장 저렴한 이 옷은 제 몸에 걸치자마자 마음에 들어버렸습니다. 너무 밝지 않은 아이보리 색의 시원한 재질. 갑갑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촌스러워 보이지도 않는 넥 라인, 입었을 때 듬직한 저의 어깨를 마법처럼 가려주어 몸을 여성스럽게 보이게 해주는 참 좋은 옷이었습니다.
친언니와 일본 여행을 준비하며, 이왕 가게 된 여행 괜찮은 사진 찍어보겠다고 구매한 반팔티입니다. 저는 이 반팔티를 받아본 지 한 달 좀 지난 시점에서 억울하게도 이 친구를 보내주어야 할 듯합니다. 커피를 시원하게 쏟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커피의 진한 색이 제 배꼽 바로 옆에서 아랫배를 지나 길게 그어져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허탈합니다. 커피 묻은 옷으로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는 지금 제 모습은 참으로 웃깁니다.
어제부터 이상하게도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었습니다. 원래 군것질을 잘하지 않는 저이지만, 한번 배스킨라빈스의 맛을 제대로 보고 나서 한 달에 한 번씩 아이스크림이 당기고는 합니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월급날을 3일 앞두고서 텅 빈 저의 계좌를 확인해 보니, 도저히 배스킨라빈스를 사 먹을 견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와 더불어 제 내면에 꿈틀거리는 '양심'이라는 것이 저의 불필요한 소비를 애써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한번 꽂히면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든 것이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구매하는 저이기에 두 눈 질끈 감고 카페에서 '바닐라 아포카토'를 주문했습니다. 아이스크림 위에 에스프레소를 곁들인 디저트입니다.
노트북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직원 분이 가져오신 바닐라 아포카토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음미라는 것은 잠시 넣어두고 열심히 퍼먹다가 어느 순간 배에 차가운 감촉을 느낍니다. 제가 흘려버린 커피가 새어 들어와서 제 배에 닿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놀라지도 않고 잠깐 커피가 묻은 옷을 응시했습니다. 정면으로 보고 옆으로 보고, 누워서 봐도 이 옷은 살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바닐라 아포카토'를 집어 들었을 때, 상상하긴 했습니다. 이 잔을 실수로 떨어뜨렸을 때 일어날 참사에 대해서요. 그리고 쏟지는 않았지만 커피가 시원하게 쏟겨버렸습니다. 후후. 역시 언제나 최악을 내다보는 저의 사고방식은, 실제로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도와주고는 합니다.
잠깐 고민합니다. 이 커피 묻은 옷에 추가적으로 커피를 더 쏟음으로써 '예술'로 승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 눈에는 지금도 사실 감각적으로 (?) 보이기는 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커피 묻은 옷을 버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친구로 비추어질 것만 같아서 진심으로 갈등의 한 순간을 보냅니다.
'내 눈에만 괜찮은 걸까?'
'아니 진짜 괜찮아 보이는데?'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하면 믿지 않을까?'
커피가 쏟은 시점에서 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쓸데없는 공상에 잠깁니다. 어차피 이 친구는 가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