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
한때는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웠다. 나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다. 10대의 나는 불안정했고, 전방위적인 기준치가 낮음-위생, 학력, 성격, 경제력, 인맥, 가정환경 등-에서 오는 타인의 무시와 질책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눈치를 보고, 불필요한 걱정을 하며 스스로를 옭아매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그 흔한 친구 한 명 곁에 두는 것이 버거워고, 그래서 숨어 살았다. 일과 운동에 도피했다. 한참 예쁜 추억을 쌓고 십 년 지기 친구를 만들어야 할 중, 고등학교 때의 시절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성인이 되어 독서를 시작하고 나면서, 자기 이해와 자기 수용과 타인 이해와 타인 공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관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길 원했고,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했다. 관계에서 오는 회의감과 나에 대한 실망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요구하는 관계에 대한 이상은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상일뿐이라고,
타인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관계에 있어서 하게 될 “실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친구를 곁에 둘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즉흥적인 모임에 나가서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그러한 자리가 “연기를 해야 하는 무대”와 다를 바 없었지만, 현재는 무아지경에 빠진 배우처럼 무대라는 강에 한줄기 빗물이 되어 녹아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머리를 써가며 타인의 의중을 파악하고, 나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아진 건 아닌지, 내 표정과 행동이 현재 부적절한 건 아닌지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관계가 두려워서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갖게 되는 모임에서 나는, 만족감과 충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돈과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는 나에 대한 실망감에 무자비한 자기 비난을 하기 시작하면서 관계 맺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술자리 그 순간은 즐겁지만, 그 이후에는 “내가 이 모임에 시간과 돈을 쓸 정도로 가치 있는 시간이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정도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술을 마시고 돈을 모으지 않고 버는 족족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옷을 구매하고 여행을 다니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여유가 없었다. 그럼으로써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쓴 것에 대한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실질적인 돈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그놈의 책임감이라는 무형의 것이 내가 다시 일터에 나갈 수밖에 없도록,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자기 계발을 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다.
20대 초반에, 나의 행동 동기는 “부정적 감정”이었다. 부정적 감정이야말로, 내가 정한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착각’했다. “나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해.”라는 생각이, “지금 이렇게 웃고 떠들 때가 아니잖아. 지금 이 자리가 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할까?”라는 생각들이 있어야만,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내게 있어서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은 일종의 ‘인내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참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기만하고, 타인으로부터 고립되어야만 이루어낼 수 있는 아주 극악무도한 시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3살의 나이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번아웃을 마주하면서,
이유 없는 무력감과 타인과의 교류에서 오는 회의감에 시달리면서,
어쩌면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고통을 느껴야만, 인내해야만, 고립되어야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었다.
부정적 감정은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행동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절대 “지속할 수 있게” 도와주지는 않는다. 부정적 감정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이는 안 빠져나가도 될 에너지를 추가적으로 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기적으로 내가 힘들고, 불쌍하고, 각박하게 살아가야 함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 “행동 동기: 긍정적 감정 vs 부정적 감정”이라는 주제로 따로 글 연재할 예정입니다 -
그때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 시작했다.
책을 하루 동안 몇 페이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읽고 싶으면 읽었다.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서 한 시간 정도는 글을 쓰고 출근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쓰고 싶으면 썼다.
매달 돈을 얼마 정도 모아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모으고 싶으면 모았다.
친구를 만나서 시간을 축내면 안 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돈과 시간을 썼다.
그제야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가 몸 담그고 있는 세상이, 내가 놓여있는 지금 이 현재의 시간이 값지게 느껴졌다. 행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부정적 감정을 느끼며 목표를 향해 나아갔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실적을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부정적 감정을 느끼며 나아갈 때는 ‘어쩔 수 없이’하는 강박적 행위였다면, 지금은 내가 원해서 하는 주도적 행위로 탈바꿈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행동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변했을 뿐이었다.
현재의 나는 하루에 14시간 일하고 잠을 4시간 자고, 짬 내서 독서를 하고 글을 쓰면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행복은 탁월한 자기 기만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내일 당장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 하루를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사용했다는 만족감에서 온다.
현재의 나는 번 돈을 내게 한 푼 쓰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2-30만 원을 기꺼이 쓰고, 남은 돈은 모조리 저금하고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자전거를 타며 출퇴근을 해도 행복하다. 이러한 것들은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조금 더 고생하자는 의미에서 나온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한다. 앞으로 내가 마주할 미래는 분명, 멋있을 거라고. 나는 분명 성공할 것이고, 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정도로 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최근에 나는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련의 과정을 잠시 미루어두고 있었다.
관계라는 것은 새로운 인연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것인데,
그러한 과정에 오는 정서적인 만족감과 행복감은 내게 굳이 필요하지 않았고,
관계가 가져다주는 수많은 이점은 많은 시간과 돈이 유입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수의 몇 명과 교류했다.
그 소수의 몇 명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중, 고등학교 때부터 알게 된 십 년지기 친구의 개념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오래된 정을 공유한 친구가 없다. 어릴 적의 나는 너무도 위태로워서 관계를 맺지도 못했을뿐더러 유지하는 것도 실패했는데, 현재의 나는 굳이 어릴 적 친구 관계를 다시 찾고 유지해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공하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넘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바뀐 점이 있다면, “인연”이라는 것은 ‘타이밍’이라는 관점의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결코 관계라는 것은, 인연이라는 것은 내가 원할 때 우연처럼 딱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주 엉망진창일 때,
미성숙하고, 아는 것도 없고, 세상 물정 모를 때,
내적으로 불안정해서 의지할 곳을 찾고 있을 때,
연결된 관계 일지라도 그 속에서 값진 인연이 탄생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아주 온전하고 성숙하며 아는 것이 많을 때,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서 타인과의 교류에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을 때,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랐을 때,
맺어진 인연이 최악의 인연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인연은 말 그대로 타이밍인 것이고, 적기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열어두기로 했다. 현재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게 되면 이 시점에서 이어질 수 있었던 수많은 인연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까.
조금은 유해지기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관대해지기로,
내게 향하는 통로를 활짝 열어놓고서,
내가 추구하는 목표에 지장이 생길 거 같을 때 그제야 문을 잠시 닫아두기로 했다. 일단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나서 괜찮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이어나가려고 했는데,
지금의 내가 조금 미흡하더라도, 나를 맞아주는 상대가 기꺼이 받아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관계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