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며 성장하며
교수가 호텔 청소를 시작하게 된 이유
죽고 싶을 만큼 외롭고 힘들던 와중에 호텔은 숨통을 틔어줄 만한 구멍이 되어주었다. 교수직에서의 책임감과 압박감이 순통을 누르는 것 같았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멎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중에는 교수로 살다가, 주말에는 호텔로 달려가서 객실을 청소하는 하우스키퍼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교수생활에 지친 나에게 호텔에서의 노동은 정신적 스트레스로부터 해방감을 준다. 차츰 능동적으로 행복을 찾아가며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행복인 줄로 착각했었다
여섯 명의 조교들이 나눠 쓰던 창고 같은 연구실에는 싸구려 커피 향이 가득했으며 눈물과 콧물이 찌든 담요들이 구석에 처박혀있곤 했었다. 오랜 기간 가난했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처음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는 매일 아침 숨을 들이마시며 행복을 만끽하곤 했었다. 나만의 연구실에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좋아하는 연구를 하면서 월급이라는 수익이 생기니 이 돈을 받아도 되는 건지 엉뚱하게 겸손하기까지 했다.
평생 교수직을 보장받는 테뉴어 심사를 통과하고 나니 허무함이 몰러왔다. 정신없이 달려와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기쁘기는커녕, 이제는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열심히 해온 일이 사실은 열정을 태울 만큼 즐기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뉴어가 목표였지 교수직이라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10여 년 전 상황을 돌이켜보니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그 감정은 사실은 긴장감과 테뉴어를 향해 달려야 하는 벅참이었다. 그것이 행복인 줄로 착각했었다.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저 우울한 감정이 아니고 우울증 말이다. 우울증을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제각기 퍼즐을 맞추듯 이리저리 맞춰가며 나의 감정상태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과 떨어져 사니 외로워서 그런 게야."
"갱년기가 온 거야."
사실은 번아웃이 온 것이었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교수는 지팡이를 들고서라도 평생 강의를 할 것이며 연구실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좋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에게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수직이 나에게 맞지 않는 이유는 여럿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내성적인 성격이다. 남 앞에 서서 말을 하거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일은 부담스럽다 못해 편두통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게다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하니 수업준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늘 완벽하지 않은 찝찝함에 자책과 좌절이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번아웃이 우울증으로 터진 것이다.
노동이 주는 힐링의 메커니즘
마음의 안정감과 평화
호텔에서 하는 일은 순서와 방법을 익히기만 하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대로 반복적인 일을 하는 단순노동이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단순노동을 통해 마음의 안정감과 평화를 느끼게 된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잡념과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청소하는 순간에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정한 패턴과 루틴이 있는 청소와 같은 단순 노동은 예측이 가능하고 내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하지가 않다.
일이 손에 익은 요즘은 나만의 추억이 담긴 음악을 들을 때도 있고 드라마나 뉴스를 틀어놓기도 한다. 음악은 옛 추억을 되살려주고, 드라마는 향수병을 달래주기도 하고, 뉴스는 시대에 뒤처지는 상실감을 채워주기도 한다.
즉각적인 성과
논문을 쓰는 일은 출판이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편집과 수정으로 기나긴 여정을 거쳐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면 학기말이나 되어야 강의평가를 받게 된다.
반면, 객실청소는 즉각적인 성과를 볼 수 있다. 깨끗해진 객실을 육안으로 보면 직관적인 만족감을 느끼게 해 준다. 정돈된 침실을 보면 뿌듯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즉각적인 성과가 일을 하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게다가 슈퍼바이저나 매니저가 잘했다, 잘하고 있다 칭찬을 해주면 긍정 엔도르핀이 즉시 온몸을 한 바퀴 돈다. 육체적으로 힘듦이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자존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교수라는 나의 직업이 자랑거리일 수 있겠지만 그들이 볼 수 없는 나의 자존감은 바닥까지 내동댕이 쳐진 상태이다. 교수도 사람인데 너무 완벽함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작은 실수는 질타를 받고 성취에 대한 칭찬은 야박하다.
호텔에서는 매우 작은 일에도 칭찬이 아낌없이 쏟아져 나온다. 매니저, 슈퍼바이저, 그리고 손님들이 간단하게 고맙다고 표현해 주는 말 한마디에도 내가 한 일을 인정받는 것 같아 눈물 나게 감동받을 때가 있다. 소소한 감동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나의 자존감을 자석처럼 끌어모아준다. 마음이 갈라졌던 이유는 인정과 칭찬의 가뭄이었지 싶다.
단순함
두 시간 내내 열띤 토론을 하며 회의를 해도 결론이 지어지지 않는 미팅이 허다하다. 교수들 간에 의견차이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가 적이 되기도 한다. 복잡한 인간관계는 직장생활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일이 힘들다기보다는 사람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단순한 일일 수록 갈등이 적다. 매뉴얼대로 청소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일도 극히 드물다. 단순함이 마음에 휴식을 줄 수 도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다.
청소하며 성장한다
단순노동을 통해 배운 힐링을 일상에도 적용해 보기로 했다. 청소하며 얻은 힐링을 통해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행복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단순해지기
단순한 노동이 주는 선물이 그 어떤 약으로도 얻을 수 없는 마음의 안정감과 평화라니, 단숨함을 일상에서 실현해 주기 위해 살림을 단순화하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가전, 책, 옷, 가구 등을 집에서 비워내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안에서의 동선도 줄고 청소를 해야 하는 시간도 줄기 시작했다. 더욱이 단순해진 옷장에 옷이 많이 비워지니 옷을 골라 입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나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감정 낭비도 줄었다.
인간관계도 단순화 시키고 있다.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일상에서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올바르게 가지치기를 하면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어 가지의 수를 줄이기도 하지만, 꽃이나 열매를 더 많이 달리게 할 수도 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은 과감하게 쳐내고, 건강한 관계는 가꿔나가는 것이다. 직장 동료, 이웃, 친구, 가족 등 모든 지인에게 나의 시간과 마음을 다 나누어줄 필요는 없다.
자존감을 높여주는 인정과 칭찬
어른이 된 이 나이에 칭찬이 고팠다고 말하기엔 쑥스럽기 그지없지만 칭찬과 인정은 작은 일을 해도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거울을 보며, 걸으며, 운전하며, 세수를 할 때도 나 스스로에게 자주 말해준다. "지금도 잘하고 있어." 마치 최면이라도 거는 것 마냥 이러한 긍정적인 멘트는 지칠만 할 때 비타민제보다, 홍삼보다 더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 아이들에게도 더 구체적인 칭찬을 많이 해주려 노력한다. 그리고 칭찬은 즉각적일 때 가장 효력이 있다.
어른이나 아이나 열심히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정받고 칭찬받을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