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면 돼
“No need to rush.” 서두를 필요 없어.
더 빨리 움직여서 체크인 시간에 맞춰 청소를 해놓겠다고 하자, 슈퍼바이저가 선서하듯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스톱싸인을 보였다. 그럴 필요 없이 그냥 하던 대로 하란다.
이 한마디가 서두름으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의 긴장감을 한순간 무너뜨려주었다. 순간, 마음 한편 여유라는 공간이 형성되는 듯했다.
하던 대로
나는 고등학생을 둔 수험생의 엄마이자 대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그리고 주말에 호텔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슈퍼바이저가 나에게 선물해 주었던 여유를 나 또한 내 아이들에게, 내 학생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는 하루였다.
더, 더, 더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잘, 더 많이, 더 완벽하게, 더, 더, 더 …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라 삶에 대한 기대치는 팽창의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서두를 필요 없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지 반성해 보았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숨통을 트여주는 여유를 허락하는 연습을 더 해보기로 했다.
학생들의 이메일에 밤낮 주중주말 가리지 않고 더 빨리 답해줄 의무는 없다. 주말에 받은 이메일은 월요일에 출근해서 답해주면 된다.
더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잠을 줄일 필요가 없다. 일을 잘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일이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몰리게 되어있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연봉을 올려주지는 않는다.
빨리 움직여 객실 한 칸 더 청소한다고 시급을 올려 받지는 않는다. 평소 속도 대로만 해도 노동의 대가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
더 빨리 움직이려 했던 이유
아르바이트 스케줄에 차질이 생겼다.
딸아이는 안 와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학경시대회 시상식에 가야만 했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기특한 딸아이를 직접 가서 축하해주고 싶었다. 학원도 없고 과외도 못 받는 이 소도시에 살면서 혼자 준비해서 경시대회에 참여한 그 도전정신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으랴.
둘째는, 엄마인 내가 가서 그 자랑스러운 순간을 사진에 담아야만 했다. 한국에서 묵묵히 응원하고 있는 아빠에게도 이 기쁜 소식과 현장감을 사진으로나마 공유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바쁜 시즌이라 차마 결근하기는 미안했다. 호텔은 주말이 가장 바쁘기 때문에 하우스키퍼가 결근하면 비상이 걸린다. 체크인 시간까지 객실 청소를 마치지 못하면 호텔에 크나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상식이라고 해봤자 15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기 때문에 호텔과 시상식장까지 왕복시간까지 고려했을 때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근 대신 사정을 말하고 휴식시간을 좀 길게 쓰겠다 했다.
통상 4시간마다 30분씩 휴식시간을 갖는데 오늘은 한 시간 정도 외출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오늘 휴식을 한 시간 정도 써야 할 것 같아.”
“괜찮아. 잘 다녀와.”
의외로 쿨하게 다녀오란다. 같은 학교 학부모라 그런지 슈퍼바이저는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해 준다.
“고마워. 다녀와서 더 빨리 움직일게. 그리고 체크인에 차질 없도록 할 테니 걱정 마.”
“아니! 빨리할 필요 없어. 그냥 하던 대로 열심히만 하면 돼.”
상사의 이런 긍정적인 반응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눈치 보며 한 시간 외출을 하겠다고 말하기까지 조마조마하게 얼었던 마음이 한순간 안심시켜 준다. 이러한 "안심"은 일의 성과를 높여준다.
허둥대다가는 비치용품을 한 가지씩 빠뜨리는 것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된다. "안심"은 허둥대지 않고 맡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안심을 한다고 해도 여유 부리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농땡이를 부리지는 않는다.
농땡이와 여유
농땡이를 부리는 것과 여유를 갖는 것은 다르다.
근무시간을 채우기 위해 일부로 느리게 움직인다거나 카메라가 없는 복도 계단이나 창고 바닥에 앉아 통화를 하는 하우스키퍼도 있다. 놀면서 시급을 받으려고 하다니, 이러한 농땡이를 부리는 행동은 고용주의 돈을 거저 받으려고 하는 도둑놈 심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단 1초의 농땡이도 허용하지 않는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때론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숨을 들이켜는 여유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열심히 일한 노동자에게는 그 정도의 여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유는 누구나에게 그냥 주어지지는 않는다. 부지런히 쌓아 올린 공든 탑 마냥 부지런함과 성실성이 일상에 배겨있다면 바쁜 와중에라도 잠시 잠시나마 숨통을 트여주는 여유도 생기게 마련이다.
여유와 부지런함의 조화
허둥지둥 말고 부지런을 떨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조금 더 빨리 움직여도 된다고 허용해주고 싶다. 가령,
설거지를 빨리 마치고 여유 있게 앉아 커피를 음미하며 책을 읽을 여유를 갖기 위해.
청소를 빨리 마치고 밀렸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도시락을 빨리 싸놓고 작정했던 골프 라운딩을 나가서 잔디를 밟을 여유를 갖기 위해.
결국 건물을 올리기 위해서 반듯이 기초공사가 필요하듯이,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부지런함으로 기초를 다져야 하는 것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늘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여유.
나 자신에게 그런 여유가 자리 잡힌다면 타인에게도 한없이 여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서두를 필요 없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