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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세계

by 담은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이 빛을 잃어버린 것은.


우리 집은 늘 회색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불안으로 가득했다.

어디서 폭풍이 몰아칠지 알 수 없는 공간,

오늘 밤은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하며 숨죽이던 시간.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자연스레 감정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슬픔도, 분노도, 기쁨조차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감정을 꾹 눌러 삼키는 순간,

내 세상은 조금씩 색을 잃어갔다.

마침내 남은 건 무채색의 세계뿐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뛰어놀 때도

그 웃음소리는 나와는 상관없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의 웃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색깔의 언어였다.

나는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 그 무리에 섞이지 못했다.


봄이 와도 내 세계엔 봄이 오지 못했다.

사람들이 꽃이 예쁘다 말하고,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다고 감탄할 때도

내 눈앞의 세상은 온통 회색으로 덮여있었다.

감정을 차단한 순간부터 감각도 닫혀버렸기 때문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조차 내게는 불안의 신호였다.

'곧 아빠가 올 시간이야'

아름다움은 두려움의 그림자에 가려버렸다.


나는 마치 투명한 유리벽 안에 갇힌 인형 같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대화, 따스한 손길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벽너머의 나에게 닿지는 못했다.

세상은 온갖 것들로 북적였지만,

나는 혼자 고립된 섬이었다.

가장 슬펐던 건 아무도 내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지워진 고독.

그것이 나의 완벽한 회색 세계였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그 회색의 흔적 속에 서있다.

세상은 분명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데

내 눈에는 여전히 회색 렌즈가 끼워진 듯 흐리다.

"왜 나만 여전히 이렇게 뿌옇게 보일까?"

"왜 나는 저들처럼 환하게 살 수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이 회색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나는 영원히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작은 용기를 내어

내 마음속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문장을 하나씩 적어 내려갈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굳게 뭉쳐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풀렸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회색벽에

실금 같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아주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손바닥 위에 살짝 내려앉은 햇살처럼,

조금만 부주의하면 놓쳐버릴 만큼 작은 빛이지만

그 빛은 분명히 내게로 들어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가.

혹시 나처럼 회색의 세계에 서 있는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홀로 갇혀 있지는 않은가.


내가 당신에게 감히 거창한 위로를 건넬 수는 없다.

다만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나도 멀고 외로운 길을 걸어 여기에 와 있다."


우리가 걸어온 시간이 다르더라도,

어쩌면 같은 회색의 평행선에서 서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회색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빛과 어둠이 섞여 만들어낸, 불완전한 색이었다.

그 안에는 분명 빛의 조각이 숨어 있었다.

오늘이 아무리 막막한 회색일지라도

내일은 조금 더 옅어진 회색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회색 속으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색이 스며들 것이다.


나는 여전히 회색의 흔적과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작은 균열로 스며든 빛을 따라가다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그 빛을 기억하는 하는 한,

우리의 세계는 더 이상 완전한 무채색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각자의 고유한 색으로

빛나는 날이 반드시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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