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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교실에 내린 눈

아이들의 민주주의, 크리스마스 회의

by moviesa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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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 은행나무는 아직 노랗게 물들어가는 중인데, 교실 안은 벌써 크리스마스다.

칠판에는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위원회'라고 적혀 있고, 아이들은 삼십 분째 회의 중이다.

나는 교실 뒤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본다.


"산타 복장은 누가 하지?"

"예산도 세워야 해."

"간식은~ 저번엔 과자 안 가져온 애 있었잖아."

한 아이가 필통을 마이크처럼 들고 일어섰다. "발언권 줘!" 옆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너 아까 세 번 했어." "그건 질문이었잖아." "질문도 발언이잖아."

나는 웃음을 참았다. 민주주의는 원래 조금 시끄럽다는 걸, 아이들은 배워가는 중이다.


산타는 누가 하나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가 손을 들었다. "그럼 모둠별로 돌아가면서 하면 어때? "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모둠은 5교시에 할 수 있겠네." 나는 그 순간이 좋았다.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아무도 지지 않는 방법. 하나를 놓고 싸우는 대신, 모두가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아이들


예산이 부족합니다

"산타 모자는세 개 있데."

"모둠 당 6 명~7명인데?"

교실에 한숨이 퍼졌다. "그럼 돌려 쓰면 되잖아." "그건 불공평하고 복잡할거 같은데..."

결국 아이들은 산타 모자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종이로 눈송이 데코레이션을 더 많이 만들기로.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줄 몰랐네."

옆 친구가 맞장구쳤다. "우리 엄마가 크리스마스 때마다 한숨 쉬시던데, 이제 알겠어."

나는 빙그레 웃었다. 예산 제약을 처음 배우는 순간이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돈이 모자란다는 것.

어른이 되면 평생 마주할 문제를, 아이들은 지금 크리스마스로 연습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트리는 초록색? 하얀색?"

또다시 작은 토론이 시작되고, 나는 지켜본다.

함께 꾸민다는 것. 그 과정이 아이들에게는 이미 축제인 것 같았다.

결과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빨리 결정하고, 빨리 끝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라고 배웠던 것들.

하지만 여기, 교실에서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빨리 혼자 가는 것보다 느리게 함께 가는 것이 더 의미있는 시간.


가을의 끝자락, 칠판에 붙은 눈송이가 햇빛에 반짝인다.

아이들이 만든 종이 눈송이는 울퉁불퉁하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햇빛을 받으면 다 예쁘다.


한 아이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생님, 우리 파티 진짜 하는 거 맞죠?"

"그럼."

"근데 우리 산타 모자도 모자르고, 큰 트리도 없고~..."

옆 친구가 끼어들었다. "야 없어도 괜찮아. 재밌잖아."


이 말에

크고 화려한 것, 멋진 결과물이 없으면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들. 부족한 걸 세고, 없는 걸 아쉬워하고,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나를 돌아봤다.


아이들은 다르다.

있는 것으로 만든다. 작아도 괜찮고, 서툴러도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도 시작한다.

함께 만들었다는 것, 그 자체가 의미니까.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는 아이들이 다시 색연필을 들었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멀었지만, 준비는 벌써 축제였다.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아무도 지지 않는 방법을 찾는 열 두 살의 통찰.


"각자 자신있는 간식 같은걸 가져오자."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스물여덟 개를 모두 초대하는 아이의 제안.


" 없어도 괜찮아. 재밌잖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함께였다면 충분하다는 이 한 마디.


언젠가부터 우리는 잊고 살았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는것.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교실 한가운데서, 아이들이 다시 가르쳐준다.

진짜 중요한 건 과정이라는 것.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작고 따뜻한 마음이라는 것.


가을 교실의 공기는 여전히 이상하다.

창밖은 가을인데, 안은 벌써 크리스마스.

하지만 정확히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시간.

그리고 그 준비가, 이미 축제인 시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함께 만들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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