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에 대하여
바쁘다는 것을 변명 삼아 어디까지 포기해야 하고 어디까진 포기해도 괜찮을까. 그리고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포기하는 것일까.
나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손발이 느린 편이다. 게다가 버려지지 않는 몇 가지 강박 때문에 불필요한 행동이 많은데, 이는 안 그래도 느린 손을 더 느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강점이라면 음료 제조에 있어 흔들림 없이 꾸준하다는 것과 바쁘다 하여도 생략하는 업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느리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막상 다른 사람이 내 속도에 대한 지적을 하면 굉장히 스트레스이다. 여기서 더 빨리하려다간 너무 많은 것을 놓칠 것 같기 때문인데 어찌 됐든 이러한 지적을 받을 때 방어기제로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저는 그래도 '어지간해선' 업무의 질(質)이 떨어지진 않아요."이다. 아, 물론 앞에선 죄송하다고 조금 더 빨리하겠다고 하고 속으로 저 말을 되뇐다.
며칠 전 입사 이래 손에 꼽을 정도로 바쁠 때, 저 말은 그저 변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어지간한 수준을 넘어버리니 질이 떨어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퇴근하는 버스에서 스스로 그동안의 내 모습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이 빠른 건 지켜야 할 것을 다 생략해서 빠르고, 나는 그것들을 지키다 보니 느린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던 오만한 내 모습.
내가 힘들어서 생략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계속 붙잡고 있다간 다른 사람이 조금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미안함 때문에 생략하는 것이라고 위선을 떨던 가식적인 내 모습.
내가 지키고 있는 것은 정말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켜야만 하는 중요한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커피를 추출할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원두량을 예시로 이야기해 보자.
한 카페의 매뉴얼이 어떠냐에 따라 조금씩은 다를 테지만, 아마 큰 틀에선 대부분이 비슷할 것이다.
원두를 몇 그램 담아 몇 그램을 추출한 뒤 추출 시간은 몇 초 내외가 될 수 있도록 그날의 커피 세팅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갈린 원두가 몇 그램인지 확인하기 위해 저울을 쓸 텐데 당신이라면 몇 그램까지의 오차를 허용하겠는가?
각양각색의 대답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나부터 말하자면 나는 ±0.1g이 내 허용 범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20g을 기준으로 20.27g은 20.00g보다 20.50g에 가깝다. 0.2g을 허용하여 20.20g을 쓰는 건 괜찮다고 보지만, 20.27g도 20.2g으로 읽는 저울이 있기 때문에 범용성을 고려하여 20.1g까지만 사용한다. 반대는 같은 논리로 19.76g부턴 사용해도 되니 19.8g도 괜찮다고 보지만 그냥 위아래로 같은 값으로 통일하기 위해 ±0.1g이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왜 이렇게 하는가?
커피 추출에서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커피가 언제, 어디서, 얼마큼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르기에 최대한 변수가 생기지 않게끔 만드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같은 값을 유지하려 하다 보니 이렇게 하고 있다. 대단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서 하는 행동도 아니고, 이렇게 해야 더 낫다는 경험에 근거한 행동도 아니다.
일반적인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라면 다른 수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굳이 바리스타가 아니어도 제 일에서 이 같은 갈림길 사이에 고민하는 경우는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업무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과 결과물에 큰 지장이 없는 선에서의 선택. 이 선택에 정답이 있다면 두 개의 중간 지점 어딘가이지 않을까.
여태까지의 나는 속도를 위해 질적 하향을 선택하는 것을 포기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 고민을 들은 나의 친구가 말해주길, "포기가 아니라 그냥 여유로 생각해도 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네가 할 일은 아직 한계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여유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거지."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선택지를 택한 자의 회고록을 여기서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