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장현 Apr 23. 2024

회고록

한계에 대하여

바쁘다는 것을 변명 삼아 어디까지 포기해야 하고 어디까진 포기해도 괜찮을까. 그리고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포기하는 것일까.


나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손발이 느린 편이다. 게다가 버려지지 않는 몇 가지 강박 때문에 불필요한 행동이 많은데, 이는 안 그래도 느린 손을 더 느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강점이라면 음료 제조에 있어 흔들림 없이 꾸준하다는 것과 바쁘다 하여도 생략하는 업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느리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막상 다른 사람이 내 속도에 대한 지적을 하면 굉장히 스트레스이다. 여기서 더 빨리하려다간 너무 많은 것을 놓칠 것 같기 때문인데 어찌 됐든 이러한 지적을 받을 때 방어기제로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저는 그래도 '어지간해선' 업무의 질(質)이 떨어지진 않아요."이다. 아, 물론 앞에선 죄송하다고 조금 더 빨리하겠다고 하고 속으로 저 말을 되뇐다.


며칠 전 입사 이래 손에 꼽을 정도로 바쁠 때, 저 말은 그저 변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어지간한 수준을 넘어버리니 질이 떨어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퇴근하는 버스에서 스스로 그동안의 내 모습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이 빠른 건 지켜야 할 것을 다 생략해서 빠르고, 나는 그것들을 지키다 보니 느린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던 오만한 내 모습.


내가 힘들어서 생략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계속 붙잡고 있다간 다른 사람이 조금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미안함 때문에 생략하는 것이라고 위선을 떨던 가식적인 내 모습.


내가 지키고 있는 것은 정말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켜야만 하는 중요한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커피를 추출할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원두량을 예시로 이야기해 보자.


한 카페의 매뉴얼이 어떠냐에 따라 조금씩은 다를 테지만, 아마 큰 틀에선 대부분이 비슷할 것이다.


원두를 몇 그램 담아 몇 그램을 추출한 뒤 추출 시간은 몇 초 내외가 될 수 있도록 그날의 커피 세팅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갈린 원두가 몇 그램인지 확인하기 위해 저울을 쓸 텐데 당신이라면 몇 그램까지의 오차를 허용하겠는가?


각양각색의 대답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나부터 말하자면 나는 ±0.1g이 내 허용 범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20g을 기준으로 20.27g은 20.00g보다 20.50g에 가깝다. 0.2g을 허용하여 20.20g을 쓰는 건 괜찮다고 보지만, 20.27g도 20.2g으로 읽는 저울이 있기 때문에 범용성을 고려하여 20.1g까지만 사용한다. 반대는 같은 논리로 19.76g부턴 사용해도 되니 19.8g도 괜찮다고 보지만 그냥 위아래로 같은 값으로 통일하기 위해 ±0.1g이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왜 이렇게 하는가?


커피 추출에서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커피가 언제, 어디서, 얼마큼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르기에 최대한 변수가 생기지 않게끔 만드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같은 값을 유지하려 하다 보니 이렇게 하고 있다. 대단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서 하는 행동도 아니고, 이렇게 해야 더 낫다는 경험에 근거한 행동도 아니다.


일반적인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라면 다른 수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굳이 바리스타가 아니어도 제 일에서 이 같은 갈림길 사이에 고민하는 경우는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업무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과 결과물에 큰 지장이 없는 선에서의 선택. 이 선택에 정답이 있다면 두 개의 중간 지점 어딘가이지 않을까.


여태까지의 나는 속도를 위해 질적 하향을 선택하는 것을 포기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 고민을 들은 나의 친구가 말해주길, "포기가 아니라 그냥 여유로 생각해도 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네가 할 일은 아직 한계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여유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거지."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선택지를 택한 자의 회고록을 여기서 이만 줄인다.

이전 07화 오픈 바의 바리스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