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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25. 2023

사랑스러운 그녀


자동문이 열리고 j는 긴소매로 입을 가리며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j를 보자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8년? 9년 만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j는 똑같은 모습이었다.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믿기기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고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도 그대로였다. 어색할 때 입을 가리며 웃는 습관도 여전했다. 그것은 도민도 마찬가지였다. 일찍 나이를 점프해 버려 이제는 되려 젊어 보이는 도민이었다. 제주 공항의 한 출구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함박웃음 지었다. 청춘의 한 장면을 함께했던 이들이 모였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랜덤 조합.

우리가 만난 것은 11년 전 어느 동호회에서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그곳에 들어온 우리는 기껏해야 20대, 30대 초반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당찼으며 앞으로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간은 흘러 이제는 아무도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고 그때 만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간혹 건너 건너 소식을 전해 들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동호회에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토끼 같은 자식을 낳았고 누군가는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되어 병원에 누워있었다. 11년이면 그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흘러가버린 세월이 야속했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거지.

도민은 아침 일찍 오겠다 하고 제주 시내 호텔에 우리를 내려주고 갔다. 여행 3주 차에 접어들며 제법 짐이 많아진 나와 달리 j의 짐은 검은 배낭과 18인치 캐리어가 다였다. 짐이 이게 다냐고 물으니 j는 여전히 입을 가리며 며칠 안 있을 건데요 뭐, 헤헤 하고는 내 짐을 들어주었다. j의 웃음소리는 흐흐와 히히 사이에 있었다. 어떨 때는 으헤, 이헤라고 들렸는데 언뜻 애기가 웃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j와 참 잘 어울리는 웃음이라고 예전에도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방바닥에 앉아 짐을 풀며 j가 말했다.

언니... 글 잘 보고 있어요.
글? 아, 인스타? 그걸 보는구나.
보다 보니 재밌어서 계속 보게 돼요. 헤헤.
그걸 읽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고맙다.
그거 보고 도민? 헤헤.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은 거예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사람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 있죠.
나도 몰랐는데 얘기해 보니까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어때요?
뭐가?
언니, 남자친구 있어요?
푸하하하하.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이 달라.
다르면 어때요?
굉장히 외로울걸. 같은 걸 보는데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얼마나 외롭겠어.
그런가.

j는 고개를 갸웃하며 동그란 눈을 껌뻑거렸다. 그 모습이 엉뚱하고 귀여워 웃음이 났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각자의 기준이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웃음이었다. 같이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종이에 번지는 수채화 물감처럼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웃음. 그런 웃음은 흔치 않기에 그런 사람을 만나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시골에 사는 부모는 40년 이상 같이 살았지만 마주 보고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함께함으로써 서로를 더 외롭게 했다. 그럴 바엔 혼자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외로운 건가.

j는 먼저 잠이 들었다. 나는 화장대에 앉았다. 내일 라산과 만나려면 미리 일을 해두어야 했다. 회사에는 모레까지 일을 못한다고 일러두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j가 엎드린 자세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고 있었다. 굉장히 불편해 보였고 경추 건강이 염려되었다.

저렇게 자면 목 돌아가는데.




알람을 끄고 모로 누웠다. 잠자리가 바뀌니 또 잠을 설쳤다. 창문 틈으로 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j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건 뭐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j는 엎드려뻗치고 있었다. 손바닥과 발바닥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있었는데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는 그 자세가 맞나? 다운독 자세라면 상체를 지면 쪽으로 더 눌러줘야 했다.

설마, 지금 몸 푸는 거야?

j가 자세를 풀며 수줍게 네 하며, 이헤 하고 웃었다.

제가 햄스트링이 짧아서요. 제가 몸 풀면 사람들이 비웃더라고요.

푸하하하하. 웃으면 안 되는데 파안대소했다.

그녀는 알까.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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