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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Nov 01. 2023

알프스 소녀


이거 입어.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내가 이를 부딪치며 떨고 있자 도민이 입고 있던 플리스 재킷을 벗어주었다. 패딩을 입고 오겠다던 나를 극구 말리더니 내심 미안한 모양이었다.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들어 다리에 감싸 묶었다. 상체는 여러 겹을 껴입어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지만 하체는 스키니 바지 하나였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j가 다리에 착용하고 있던 발토시를 벗어 내게 건넸다.

아니야. j도 추울 텐데.
저는 하체는 별로 안 추워요.
고마워.

재빨리 토시를 받아 들고 다리에 묶었던 재킷을 풀어 양발에 토시를 끼웠다. 도민의 재킷은 우비 안에 껴입었다. 한 겹을 더 입었을 뿐인데 몸이 따뜻해졌다. 함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따뜻한 일이었나. 돌봄을 받을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이 새삼 따스하게 느껴졌다. 혼자 여행은 아무래도 추웠다.

이제 또 가볼까.

대피소 밖으로 나오며 도민은 나와 j에게 스틱을 한 짝씩 권했다. 나는 내 몫의 스틱을 j에게 양보했다. 발 토시에 대한 답례였다. 바람이 아까보다 더 강하게 몰아쳤지만 토시와 재킷을 입 나로서는 든든했다. 윗세오름 해발 1700M라고 새겨진 돌에서 사진을 찍고 그 너머를 향해 올라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눈보라에 감춰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라산의 정상이 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저 위에 록담이 있다. 흰 사슴들이 물을 마셨다는 그 록담. 남벽분기점은 록담의 둘레를 따라 난 길 끝에 있었다. 윗세오름까지는 눈이 얼추 녹았지만 이곳은 어찌 된 일인지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더 장관이었다. 장대한 설산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코발트블루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뭐, 스위스 저리 가라다. 한 번도 밟히지 않은 눈 위를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고 싶었지만 가이드 줄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이 광경을 혼자 보고 있기가 아까웠다. 여행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록담이 점차 가까워지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엄마가 몸을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다.

엄마, 여기 어디게.

엄마가 놀란 얼굴로 반응했다.

오, 한라산이네.
어, 여기 한라산. 와본 적 없지?
없지.
보여줄게.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산에 오를 수 없는 엄마에게 온통 눈으로 뒤덮인 라산의 절경을 보여주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다리가 저린 엄마는 이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평생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한 대가였다. 고생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낙은 오지 않고 몸은 병들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눈가가 축축해졌다. 세찬 바람이 건조한 안구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다시 남벽을 배경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니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가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집안 청소를 하다 발견한 빛바랜 앨범에서였다. 아직 삼십대였던 엄마는 그때만 해도 활짝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저기가 백록담이야. 멋지지?
멋지다. 우리 딸.

한라산이 멋지냐고 물었는데 딸이 멋지다고 했다. 처음이었다. 엄마에게 멋지다는 말을 들은 것은. 일을 그만두고 글을 쓸 때도 남들 똑같이 살라던 엄마였다. 글쓰기를 그만둔 이후에도 직장에 다니지 않는 딸에게 안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며 공무원 시험을 권하던 엄마. 마흔이 넘도록 변변한 직장도 없이 혼자 지내는 딸을 걱정하던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멋지다고 말했다.


기분이 들떠 올랐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전화를 끊고 앞서 나간 도민과 j를 따라잡기 위해 뛰어갔다. 눈길 위를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폴짝폴짝 뛰며 요들송을 불렀다. 아름다운 알프스 산새들 놀러오는 아름다운 마을 레이레이호 레이레이호. 기분 좋다. 새털구름이 발아래 떠 있고, 저 멀리 비행기가 나보다 낮게 난다. 칼바람이 온몸을 때리고 얼굴이 언 듯 감각이 없어도 레이레이호.


도민과 j는 한참 이어지는 내리막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계단이 있었지만 눈에 덮여 있어 미끄러질 수 있었다. 스틱을 짚고 있는 j가 선두에서 병목현상을 만들고 있었다. 등산객들은 j를 비켜 지나갔고 나도 j를 앞질러 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앞에서 보니 j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거의 사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스틱에 상체를 태운 채 내려가고 있었다. j의 바로 뒤에 있던 도민이 스틱을 달라 하더니 몸소 시범을 보여주었다.


스틱을 앞쪽에 꽂으면서 발을 동시에 이동시켜. 이렇게.


무게중심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옮기는 도민의 동작은 꽤 난이도가 있어 보였다. 아침에 j가 몸 푸는 장면을 보았기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일이면 j는 온몸이 다 쑤실 것이다.


남벽분기점으로 향하는 내내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이곳이 남쪽을 향하고 있음에도 눈이 녹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음장 안에 있는 것 같이 춥고 고양이 발톱 같은 칼바람이 휘몰아치기 때문이다. 우레와 같은 바람 소리가 귀청을 얼얼하게 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바람에 손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결국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눈에 담아두기로 선택했다. 라산이, 록담이, 이 멋진 녀석들.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어 면면을 샅샅이 살피고 다시 걷기 시작하려는데 도민이 j를 지나쳐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곤 큰 몸을 잔뜩 움츠리며 말했다.

나 옷 좀 줄래. 너무 추워.

내가 추울 거라고 했지! 왜 패딩을 못 챙기게 했어!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도민은 자신도 민망한지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나는 말없이 옷을 벗어 도민에게 건넸다. 도민은 옷을 받아 들고 잽싸게 입었다.



눈 덮인 라산과 코발트블루 하늘




알프스 소녀 하이디

https://youtu.be/4V600qB3TUI?si=OR2lX7ZBGsDbC2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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