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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28. 2023

지금 이 순간


이른 아침 도민의 집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패딩 입어야 하지 않을까? 추울 거 같은데.
하나도 안 추워. 걷다 보면 몸에서 열이 나.
나 지난번에 갔을 때 엄청 추웠어.
그때는 2월이었잖아. 지금은 3월이고.
그래?

내가 반신반의하자 도민은 안심하라는 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작년 이 맘 때쯤 너무 더워서 반팔 차림으로 다녔다니까.

난 더위 안 타는데, 추위 많이 타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등산애호가인 도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대신 있는 옷을 죄다 껴입었다. 반팔티, 긴팔티, 청색 남방, 인디언 핑크색 트레이닝복에 후드티까지 여섯 겹. 바람막이용 우비와 감귤모자까지 챙겼다. 덕분에 몸이 무거워졌다. 신발도 무거운데. 뒤뚱거리며 걷는 품이 꼭 펭귄 같았다. 도민이 500ml 생수 두 병을 건넸다.

난 한 병이면 돼.
안 될걸. 두 병은 있어야 할걸.
지난번에 반 병도 안 마셨어.
그때보다 코스가 길다니까.
아이 참.

내가 볼멘소리를 하며 물병 2개를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몸도 무거운데 가방도 무겁다. 입이 댓 발 나왔지만 도민을 탓할 수는 없었다. 도민의 가방은 흡사 피난민의 가방이었다. 내 노트북 가방의 2.5배는 되었고 온갖 등산 장비에 당이 떨어질 것을 대비한 간식과 정상에서 먹을 컵라면 물까지 3인분을 챙겼으니... 이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한 도민의 배려에 감사해야 했다. 짐 정비를 마친 후에는 김밥집으로 이동했다. 먹는 것에 진심인 도민이 김밥도 미리 주문해 둔 터였다. 도민은 빈 공간이 없어 보이는 가방에 김밥 세 줄을 쑤셔 넣고 택시를 잡았다.

어리목 주차장에 내리자 광풍이 불었다. 한라산은 날씨를 따로 확인해야 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둘러 감귤 모자를 쓰고 보라색 우비를 입고 보온을 위해 마스크까지 꼈다. 패딩을 가져오지 않은 게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산속으로 들어가면 나무들이 바람이 막아줄 테고 도민의 말 대로 열이 날 것이다. 피난민 가방을 멘 도민이 앞장섰고 내가 펭귄 걸음으로 뒤뚱대며 나아갔고 j가 뒤따라왔다. 지하철역 개찰구 같은 입구를 통과하자 낯익은 나무숲과 오르막길이 나왔다. 다시 보는구나. 12일 만이었다. 나를 한껏 웃게 했던 라산. 그것은 우리만의 비밀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얼굴 근육이 느슨해졌다.  

앞장섰던 도민이 안내판 앞에 멈춰 섰다. 라산의 능선이 약식으로 그려진 탐방로 안내판이었다. 도민은 현위치를 짚으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을 지나 돈내코로 내려올 거야. 밥 먹고 내려오 6~7시간 정도 걸릴 거.

돈내코가 내게는 돼지코로 들렸다. 제주 방언 같은 이 귀여운 이름은 돼지 돈豚과 내 천川 자를 썼고 코는 제주말로 입구 그러니까 돼지들이 물을 마시는 입구라는 의미였다. 순간 돼지들이 단체로 코를 박고 물 마시는 장면이 떠올라 콧방귀가 났다. 그때는 몰랐다. 그곳이 어마무시한 곳임을.

한 번 와서 그런지 오름길이 가뿐했다. 제주에 와서 체력이 좋아진 건지 전혀 숨이 차지 않았다. 양팔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무들이 내뿜는 상쾌한 공기가 폐부로 들어와 몸 안을 훑고 지나 머리까지 식혀주었다. 워커를 신고 산에 오를 정도로 등산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이제는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또 한 번 웃음이 났다. 제주에 와서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었는데, 어떤 것을 보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는데 이제 다리도 제법 굵어지고 전보다 웃음도 많아지고 마음도 단단해졌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가면 다시 뭔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뿐이었던 긴 터널 끝에 빛이 보이고 밖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 같은 것이 저 아래서 꿈틀댔다.

그 사이 달라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사제비 동산에 이르러 눈 속에 감춰져 있던 라산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와.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뉘 집 자식인지 몹시 잘생겼다. 지구상의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장대하고 근엄하고 고요하며 사려 깊은 라산이었다. 언제 다시 온대도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안아줄 것이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어린아이처럼 나를 웃게 할 것이고, 축 쳐진 나의 어깨를 떠밀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지지해 줄 나의 친구, 라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칼바람이 굉음을 내며 손을 할퀴고 지나갔다. 패딩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줄곧 후회될 만큼 추웠지만 지금 이 순간을 찍어야 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라산에 다시 오길 잘했다.  




도민이 찍은 파노라마 뷰

멀리 록담
자오선
j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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