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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Nov 08. 2023

뒷담화


아니, 왜 패딩을 못 가져가게 해서!

호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 도민이 이래저래 고생한 것은 알지만 도저히 패딩만큼은 용서가 안 되었다. j는 어디가 불편한 사람처럼 벽을 짚으며 침대 위에 누웠다. 아고고고고.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 추워 죽는 줄 알았네.
패딩 안 가져왔으면 얼어 죽을 뻔했어요.

나와 달리 안에 껴입을 옷이 없었던 j는 천만 다행히 패딩을 입고 왔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길을 가자고 할 수가 있어? 관리도 안 되어 있고 사람도 안 다니더구. 화장실도 없고.

내 언성이 높아졌다. 세면도구를 꺼내기 위해 노트북가방을 여는데 물 병 두 개가 나왔다.

참 내. 반 병도 안 마셨네. 한 병은 아예 뜯지도 않았구만.
저도 물 한 병도 안 마셨어요.
가방만 무거웠잖아.
오빠가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우린 물도 안 마시고 추위도 많이 타는데.
아, 진짜, 도민...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j도 나도 평소 등산은커녕 잘 걷지도 않는 타입인데 어쩌자고 그런 코스를 추천했는지. 도민을 향한 나와 j의 불평은 멈출 수가 없었다.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힘들었으므로.

옆방에 다 들리는 거 아냐?

내가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j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방 안이 일지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조용해졌다. 불평을 멈추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물줄기를 오래도록 맞으며 잠시 북극곰은 잊었다.

씻고 나왔을 때 j는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안 씻어?
저는 이따 씻을래요. 움직일 힘이 없어요.
뜨거운 물에 몸 지져야 돼. 그래야 근육이 풀려.
조금 이따가요.

화장대 앞에 앉았다.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션을 바르는데 j가 말을 걸다.

언니, 어머니 건강이 안 좋으세요?
연세가 있으시니까. 시골 분이셔서 몸을 많이 써서 망가진 거지.

j에게 엄마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sns에 올린 여행 노트를 통해 알고 있는 듯했다. 아이크림 바르고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겨 뭉친 다리 근육을 주물렀다. 종아리가 돌덩이 같았다. 다리 근육은 제때 풀어주지 않으면 보기 싫게 알통이 된다. 걸레를 빨 듯 힘주어 종아리를 문지르는데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j가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언니도 엄마 목소리 녹음 많이 해두세요. 나는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그러지 못했거든요.
어머니 돌아가셨어? 언제? 아, 이런 거 물어도 되나?
괜찮아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2개월 만에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니까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없더라고요. 병원에 있는 동안 제가 간호했는데 엄마 목소리를 녹음하지 않은 게 후회되더라고요.
그랬구나.
엄마 일을 겪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 많이 즐기려고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으헤.

j가 아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기론 j 아버지가 안 계셨다. 아이 같은 얼굴에 이런 사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진은 서귀포시 유동커피 화장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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