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xd Nov 04. 2023

고난의 행군


간신히 남벽분기점에 도착해 데크에 가방을 패대기치고 드러누웠다. 먼저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남녀 일행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도민과 j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살 것 같다. 눈길에 바람과 사투하며 내려오느라 상당히 고전했지만, 이렇게 누워있으니 바람이 비껴간다. 참 좋다. 따사로운 태양이 은은하게 비추고 발아래 남벽이 누워있다. 이 모든 게 비현실적인 장면 같았다. 사람들이 등산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녀 일행은 우리 셋의 사진을 찍어주고 다시 윗세오름으로 올라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그들과 달리 돈내코탐방로를 지나 남부였다. 여행 초반 제주도나 깨볼까 생각했는데, 정말 동부와 서부를 지나 남부까지 여행하게 된 셈이다. 아무 기대 없이 온 여행이었는데 의외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데. 그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던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서울에 가면 많이 걷고,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해야지.


기대하면 반드시 실망했고 목표하면 언제나 실패했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계획하지 않게 되었다. 이 여행도 그랬다. 그랬던 내가 여행 이후의 삶을 계획하고 있다. 정말이지 많이 달라졌다. 내 안의 어린아이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돼지들이 단체로 코를 박고 물을 마셨다는 돈내코탐방로가 시작되었다. 무려 7km에 이르는 완만한 경사길이었다. 7km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 나지 않았지만 도민은 서 너 시간 정도 소요될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걸은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니. 내려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다리가 서서히 풀리는 것 같았다. 내리막길을 걷다 전망대가 보이면 가방을 베개 삼아 대자로 누웠다. 그 모습을 보고 도민이 희죽거리며 말했다.

넌 왜 자꾸 눕니.
힘드러...
의자 있잖아.
누워 있으면 바람을 피할 수 있거든. 하늘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언니는 자유영혼이야. 원래 예술가는 영혼이 자유롭잖아요.

j가 으헤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유영혼인지는 모르겠고 예술가인지는 더더욱 모르겠으나 이대로 자고 싶다. 파아란 하늘을 이불 삼아 자장가 같은 바람 소리를 들으며. 하지만 또 내려가야 한다. 저 앞에 보이는 개구멍 같이 생긴 나무숲으로 들어가 그럼 록담은 보이지 않게 되겠지. 이제 록담과도 이별할 시간이다.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임을 알기에,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나 록담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록담아, 안녕.


개구멍 안으로 들어오자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울퉁불퉁한 돌길이 이어졌다. 돈내코탐방로는 자연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었다더니 그냥 방치했다는 의미였다. 바람은 완전히 멈췄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돌밭에 속수무책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아프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고, 발목이 이러다 큰일 나겠다고 경고음을 울렸다. 어느덧 하체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도민도, j도, 나도 말이 없다. j는 계속 뒤처졌는데 웃음기는 진즉에 가셨고 산에 완전히 질린 표정이었다. 단언컨대 나의 얼굴 또한 그에 버금갔을 것이다.


네 시간 가량 이어진 고난의 행군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돈내코탐방로는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다. 실제 하산길에 우리 외에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탐방로를 추천하며,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면 내리막보다는 오르막을 권한다. 안 그러면 무릎이 아작나는 수가 있다.



이전 03화 알프스 소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