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통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안부를...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많은 사람은 결혼을 한다.
또 많은 사람은 이혼을 한다.
한쪽의 잘못 때문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쌓인 작은 균열 때문일 수도 있다.
때로는 누군가 특별히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게 되는 경우의 사람도 있다.
결혼은 사회적으로 대체로 순기능을 한다.
양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길러내고, 가정교육을 통해 사회의 질서를 지킬 줄 아는 구성원으로 만들어 낸다. 일부일처제는, 약육강식의 자연질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 소외되는 사람을 적게 만드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장치이기도 하다.
사회 말고 개인의 삶으로 보자면 양면성이 있다.
좋은 결혼은 평생의 동반자이자 믿음직한 안식처가 되지만, 나쁜 결혼은 개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짧은 연애를 통해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모두 알기 어렵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인해 나쁜 사람 옆에 머물러야 하고, 다른 좋은 이성을 만날 기회를 박탈당한다.
한국의 기혼 부부 절반가량이 1년 이상 부부 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자녀를 위해,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함께는 살지만, 정서적 교감도, 육체적 친밀감도 사라진 상태다.
생명체의 본능에 비추어 보면 섹스리스는 자연스럽지 않다. 서로 호의를 가진 두 존재는 건강한 상태라면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관계의 무언가가 멀어진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의 남은 인생을, 껍데기뿐인 결혼생활 속에서 지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물론 결혼을 해체하는 것은 즉흥적 판단이어서는 곤란하고 신중한 숙고가 필요하다. 특히 어린 자녀를 키우는 중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만약 자녀가 커서 성인으로 자라난 상태라면?
한국 사회는 결혼이 쉽지도 않지만, 결혼을 해체하기도 여전히 어렵다. 이혼과 재혼은 차갑게 평가되고, 특히 여성에게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백년해로를 이상으로 여기며 여성의 정절을 강조해 온 가족 중심의 유교 문화, 결혼을 신성시하는 기독교 문화, 예술과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영원한 사랑’의 신화가 겹겹이 쌓여 있다.
안젤리나 졸리는 세 번 결혼을 했으니, 매리지 스테이터스가 싱글 기혼 싱글 기혼 싱글 기혼 싱글로 6번이 바뀌지만, 한국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그것은 미국의 이야기일 뿐이다. 매리지 스테이터스는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본능 역시도 영원한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인간의 결혼과 유사한 일부일처제를 하는 동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부부금실의 대명사인 원앙은 사실 매년 짝을 바꾼다.
일부일처제를 고집한다고 여겨지는 앵무새나 앨버트로스도 상대방이 시원치 않으면 상황에 따라 짝을 갈아탄다.
생존과 번식 효율에 더 유리한 선택을 할 뿐. 인간만은 예외일까.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헌법재판소는 2015년 2월 간통죄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부적절한 정서적, 육체적 교감을 해도 형사 처벌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간통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게 된 것이다.
간통죄 폐지로 우려되던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성적 자기 결정권이었다.
물론 배우자에 대한 민사적 책임은 여전히 남지만, 법리적 기준에서조차 일부일처제는 개인의 권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 셈이다.
우리 사회는 스몰토크가 참 익숙하지 않은 문화이다. 한적한 지하철 안에서도 폰만 들여다볼 뿐, 대화는 없다. 아파트의 같은 층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마주쳐도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보다 계산된 만남과 결과를 추구한다. 남녀가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빈자리는 유흥 산업이 대신 채우기도 한다.
자유로운 연애와 성이 터부시될수록 음지를 키우고, 사람의 사이를 왜곡시킨다.
자유로운 연애란, 단발성의 무책임한 쾌락이 아니라, 자유롭게 말 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선택하고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성을 숨기고 억압할수록 사회는 경직되고, 인간관계는 더 메말라간다.
한국 문화의 이중성과 가식을 비판하며, 30여 년 전 즐거운 사라를 펴냈던 고 마광수 교수가 있었다. 그는 선구자인가.
결혼 적령기의 남녀는 서로에게 끌리는 만남보다는, 사회적 눈치나 조건을 보고 연애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가.
조건을 보고 결혼한 후, 마음의 사랑은 다른 이성에 빠져있거나 유흥업소를 다니는 사람은 문제가 없는가.
문제가 많은 결혼이라도 새로운 이성을 찾지 말고, 결혼 상태를 지속해야 하는가.
답은 각자 다를 것이다. 다만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관계, 조금 더 자유로운 사회, 행복한 개인의 인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