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문제는 인종차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사람 사이에 대한 첫 이야기로 인종 문제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전에 우선 야구 얘기.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오타니 쇼헤이 선수는 2025년 시즌 홈런 55개를 몰아치며, 홈런 랭킹 2위에 등극했다.
부상 관리 때문에 투수로는 잘 출전하지 않지만, 한번 공을 뿌렸다 하면 100마일 (시속 161km/h) 이상의 직구 구속을 찍곤 한다.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설까치가 현존 인물이었다면 오타니 쇼헤이에게 가장 잘 들어맞지 않을까?
오타니나 손흥민 선수처럼 아시아인들이 스포츠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곤 하지만, 사실 스포츠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 중에는 아프리카 출신(또는 아프리카계) 선수들이 많다.
서아프리카계의 긴 팔다리와 속근의 탄력은 축구, 야구, 농구 등 순간적인 반사신경과 스피드를 활용해야 하는 스포츠에서 잘 활용된다.
반면,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와 같은 동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은 강한 심폐 지구력과 지근을 활용해 마라톤을 주름잡는다.
이렇게 서아프리카계와 동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조금 다른 특성을 가지는 이유에는 환경적 가설이 있다.
서아프리카 지형은 덤불이 우거져 고양이처럼 기습하는 사냥 전략이 필요했고, 동아프리카는 넓은 초원지대가 많아 개처럼 추격사냥하는 사냥 전략이 필요했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환경에 따라 서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는 속근 발달에 유리한 ACTN3 유전자(별칭 '스프린터 유전자')의 빈도가, 동아프리카계에게는 지구력에 유리한 유전자가 높다는 유전학적 연구 결과도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신기하게도 서아프리카에는 실제로 표범 같은 고양잇과의 동물이 많이 살고 있고, 동아프리카에는 야생 들개 무리들이 많은 개체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인종에 따라 특성이 다른 것일까? 흑인은 운동능력이 우월한 인종인 것일까?
공상과학철학자가 학교를 다니던 1980~90년대만 해도 세계지리 시간에 사회과부도를 펼쳐놓고, 세계 사람들의 모습을 구분하며 명칭을 배우던 기억이 난다.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앵글로색슨족, 훈족 등...
그러나 2007년 개정 교육과정(2009년부터 적용)에서 이러한 교육 내용들은 사라졌다.
교과서에서는 “지구에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살고 있다”는 표현 대신, “인류는 환경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라는 식의 문화·환경 중심 서술로 바뀌었다.
왜 바뀌어야만 했을까?
흑인, 황인, 백인이라는 단어에 차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피부가 검은 사람을 흑인이라고 부르고, 하얀 사람을 백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왜 차별적일까?
이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스포츠를 쳐다볼 필요가 있다.
손흥민 선수가 착용한 토트넘 유니폼 어깨 쪽에는 EPL을 상징하는 사자 마스코트 아래에 글귀가 쓰여있다.
'NO room For racism'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인종차별을 위한 여지 없음'
'인종차별 반대'?
일반적으로는 십중팔구 이렇게 번역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낡은 번역이다.
정확하게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인종차별은 인종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다른 인종을 차별하는 것인 반면, 인종주의는 '인종을 구분하는 행위 자체'를 말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race' 개념 자체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과학적으로는 어떨까?
케냐에 사는 사람과 아시아에 사는 한국인은 무척 다르게 생겼지만, 아무나 한 명씩을 뽑아서 유전자를 대조해 본다면, 그 차이는 0.1% 정도로 나온다. 3억 개의 염기서열 중 약 30만 개가 다르게 나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 사람 두 명을 대조해도, 케냐인 두 명을 대조해도 유전자 차이는 거의 같은 0.1% 정도로 나온다는 것이다. (일란성쌍둥이는 제외)
케냐인은 태양빛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환경적 원인으로 멜라닌색소가 많은 검은 피부의 유전자가 발달했을 뿐, 그 성질은 3억 개의 유전자 염기서열 중 단 한 가지 차이에 불과하다. 케냐인의 검은 피부, 곱슬머리, 긴 다리, 발달된 심폐와 지근을 다 합쳐도 수십 개에 불과하다.
만약 피부색만으로 인종을 구분한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기준으로도 인종을 구분해야 옳지 않을까?
쌍꺼풀종, 무쌍종, 인순이 씨처럼 노래 잘하는 종, 한현민 씨처럼 비율이 좋은 종, 예민한 종 등...
인류의 기원에 관심을 혹시 가져본 사람이라면 최초의 터전이 아프리카였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프리카를 무대 삼아 살던 고대 인류는 유럽, 아시아, 호주, 아메리카 등지로 진출해 각자의 환경에 맞게 적응했을 뿐, 99.9%의 유전자는 동일하다. 그리고 나머지 0.1%의 차이는 대륙간 스케일을 따질 필요도 없이, 바로 옆 직장 동료나 친구와 비교해 봐도 그 정도의 차이가 나타난다.
그 0.1%의 차이로 인종을 구분하려면, 평범한 얼굴을 가진 공상과학철학자와 예쁘고 잘생긴 독자 여러분과는 다른 인종으로 구분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해,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인류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떠돌이 생활을 해 왔는데,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5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 정착했던 인류라고 해서 어디선가 뚝 떨어져 온 것은 아니다.
빙하기 때 붙어있던 한, 중, 일의 육지를 통해 서로 왕래했고, 전쟁, 무역, 파견, 여행, 이민 등을 통해 유전적 다양성은 계속 증가해 왔고, 지금도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지역적 기반 말고도, 언어나 종교, 생활관습 등이 유사한 문화적 특성에 포커스를 두고 민족을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를 본다면 어떨까? 북한의 말과 남한의 말은 서로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달라졌으며, 정치 경제에 기반한 문화와 생활양식은 완전히 서로 다르다.
민족을 정의하는 여러 요소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민족의 개념 자체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민족 역시도 유전적 실체라기보다는 언어, 문화, 국적이라는 정치적 경계를 통해 규정되는 유동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무리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국적' 뿐이다.
우리는 동남아시아 등에서 우리나에 일하러 온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경향이 있다. 매스컴에서는 이를 바람직하지 않다며 '인종차별'이라고 표시하지만, 이제는 한 번 생각해 볼 때다.
'인종차별'이 문제인가, 아니면 '인종주의' 자체가 문제인가.
우리는 외계인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다가오면 함께 이겨내야 한다.
우린 누구나, 서로 아주 조금씩 다르게 생긴,
99.9% 같은 '인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