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와 경제 체제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한 마디로 설명하는 문구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각 경제주체가 최대한 효율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려는 의지들이 모여, 정부가 굳이 시장에 손을 쓰지 않아도 수요, 공급, 가격의 균형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보이지 않는 손'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사람의 이기심(최대한 이익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현대의 경제학자, 사회학자들이 아담 스미스에게 점수를 준다면 아마 70점 정도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손'은 대체로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한계도 있기에 30점을 감점해야 한다.
첫째, 각 경제주체는 최고의 경제적 의사결정에 자주 실패한다.
좋은 품질의 30만 원짜리 패딩을 사는 대신, 그저 그런 품질의 200만 원짜리 명품 브랜드 패딩을 사곤 한다.
기대수익률이 -50%인 복권이나, -10%인 카지노에 꾸준히 돈을 쓴다.
주가가 비쌀 때 주식을 사고, 쌀 때 팔아 손해를 본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최고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원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둘째, 사람은 의외로 이익보다는 공정함에 더 비중을 두기도 한다.
2만 원짜리 음식을 주문했는데, 식당 주인이 나에게는 2만 원을 그대로 내라고 하고, 잘생긴 친구한테는 만원만 내라고 한다고 치자.
그러면 나도 만원만 내겠다고 주장하거나, 친구를 설득해 15000원씩 내는 경제적인 선택들을 접어두고, 친구에게 '너도 2만 원을 내야 한다'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SNS 강아지 영상들을 보다 보면, 어떤 개에게는 큰 먹이를 주고, 어떤 개에는 작은 먹이를 주며 장난치는 장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작은 먹이를 받은 개는 작더라도 그것을 먹는 것이 이득일 텐데, 먹지 않고 항의하면서 짖어댄다.
개도 이익보다 공정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사람은 더욱 당연하지 않을까?
공정함에 대한 분노는 때때로 집단적 의사 표시로 나타나곤 한다.
셋째, 사람은 이타심도 가지고 있는 종족이다.
협력하고, 남을 위하고, 측은해하고, 사랑한다.
만원을 주고 제육덮밥을 주문하는 대신, 굶고 있는 친구에게 4천 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을 사주고, 나는 6천 원어치 김밥과 라면을 먹는다.
방금 이런 이타심이 시장을 변화시켰다. 제육덮밥을 파는 집은 가격을 500원 내리기 시작했고, 편의점 도시락과 김밥은 200원씩 올랐다.
넷째, 시장경제를 정부의 개입 없이 계속 방치할 경우,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지본주의의 승자독식 구조 때문에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자꾸만 많아진다.
이러는 동안 100억 현금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누워있어도 1년 이자만 2억 원 이상이 들어올 것이다. 또 이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에게 상당한 자산을 물려준다.
빈익빈부익부의 가속화. 가만히 방치해 두면 필연적으로 폭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따라서 적절한 시장 개입이 오히려 부자들을 위해 좋을 수 있다.
아담 스미스는 훌륭한 통찰을 제공했지만, 사람을 지나치게 이기적, 효율적이기만 한 대상으로 바라보는데 한계를 가졌다.
오늘날 지구상에 완전 자본주의를 채택하며 세금을 걷지 않고 있는 나라는 없다. 역설적으로 세금을 걷지 않는 순간, 정부가 존재하는 의미 자체가 사라져 버리게 되니 말이다.
완전 자본주의가 세금이 0%라면, 공산주의는 세금이 100%다.
내가 창작하고 생산한 것을 소유하지 못하며, 정부가 모두 가져간 후 별 기준도 검증도 없이 부분적으로 재분배 받는다. 배급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이런 공산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 역시 찾을 수 없다.
공산당이 1당 독재 중인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 북한마저도 경제 시스템은 자본주의에 무척 가까워져 있다.
자본주의의 하이라이트중 하나인 프로 스포츠.
1년에 5천만 원 겨우 벌까 말까 한 편의점의 한 사장님과, 연봉 100억 원을 받는 축구선수 둘 중 누가 더 강자일까?
칼 마르크스의 실수 중 하나는 사회 계급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실제 사회의 구조가 매우 복잡해져 간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자본가인 편의점 사장님보다는 월급 받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축구 선수가 압도적으로 사회적 권력이 크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실수는 사람의 본성을 너무 이타적이고, 도덕적이며, 공정하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내 것이 없이 세금을 100% 내야 하는 환경에서, 타인과 사회를 위해 열심히 창의하고 사고하며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에게도 완전한 오답 처리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본론에서 주장한, 대량생산 공급 과잉 → 재고 증가 → 비용 절감 → 해고 → 수요 부진 →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위기는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30점을 부여해 본다면 어떨까.
오늘날의 정부는 금리 변동을 통한 경기 조절, 소비쿠폰 지급, SOC 건설 사업, 독과점 규제 등을 통해 이러한 자본주의의 위험 요인들을 관리해 나가고 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이기심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이타심을 근간으로 하는 공산주의.
사람은 대체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이타적인 것일까?
이를 비율로 나타내 볼 방법은 없을까?
비율이 우리 사회 시스템과도 관련이 있을까?
다음 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더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