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 시스템은 누가 만든 걸까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사람들과의 여러 관계 중 남녀 관계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밀림에서 홀로 생활을 하는 호랑이도, 홀로 하늘을 나는 독수리도, 혼자서는 후손을 잇지 못한다.
암컷은 수컷을 만나야, 수컷은 암컷을 만나야 종족의 영속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가 있다.
사람의 유전자도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사랑, 자식이 부모에게 가지는 애착, 형제애, 전우애, 동료애보다 강렬하게 발동되는 것이 바로 남녀 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의 예술과 대중문화는 늘 남녀의 사랑을 가장 많은 주제로 다룬다.
200년 전 클래식이든, 50년 전 대중가요든, 현대의 K팝이든, 언제나 울고 웃는 남녀 간의 사랑이 메인 테마로 다뤄진다.
지난 여러 화들에 걸쳐 남녀 간의 사랑을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남녀 관계만 잘한다고 해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복잡하고 고도화된 세상이다.
아니, 굳이 남녀 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살아도, 사회 시스템에 잘 적응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 후반부부터는 남녀를 넘어 사람들이 만드는 집단, 갈등, 그리고 집단이 모여 만드는 사회의 질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후반부를 공상과학철학자와 함께 하다 보면 여러분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같은 거대한 비물질적 시스템조차도 결국 '종족 생존과 영속성'이라는 우리의 유전자 설계와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부 사례로 넘어가기 전, 우선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이러한 비물질적 시스템들을 만들어내게 했을까?
첫째, 개개인이 편리해지고자 하는 욕구다.
유전자가 생존 환경에 보다 적합하고자 하는 본능이 사람의 창의성을 자극한다.
둘째, 종족 전체의 영속성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본능이다.
공동체의 발전과 유지를 위한 본능이 최선의 사회 시스템을 강구하게 한다.
셋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밈의 전승 때문이다.
왜 그런지 모르거나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지만, 특정 사회에서 오래전부터 따르고 있는 관습들이다.
불운을 피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미국인들, 밤에는 휘파람을 절대 불지 않는 일본인들, 빨간색으로는 이름을 쓰지 않는 한국인들이 그러한 예들이다.
무엇이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냈는지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만들어 냈을지가 궁금하다.
글을 통해? 인터넷의 발달로?
아니다. 글자가 없던 1만 년 전에도 사람들의 사회는 나름대로의 시스템과 전승되어 온 밈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회의 시스템은 바로 사람들의 '신념'이 모여 만들어진다.
그 신념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 과학적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생존 본능의 발현이거나, 자기도 모르게 주입된 생각일 수 있다.
이를 가리켜, 유발 하라리는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고 불렀다.
약 7만 년 전, 고대 인류는 실재하지 않는 신화적인 개념 (예: 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무서운 신이 벌을 내린다고 믿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이 '공통의 허구적 신념' 덕분에 혈연관계가 아닌 수많은 사람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행동할 수 있었고, 이로써 집단 인구의 크기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유전자가 아닌 신념이 만든 최초의 사회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은 왜 신념을 가져야 했을까?
바로, 사람은 혼자서는 살기 어려운, 무리생활을 하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고대 인류 하나가 무리를 이탈해 홀로 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당장, 설악산 높은 외딴곳에서 길을 잃고 홀로 떨어진 상황을 생각해 보자. 혼자서는 불도 피울 줄 모르고 작은 다람쥐 하나 못 잡는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에게는 무리에 속해야 한다는 유전자가 강력히 작동하고 있으며, '신념'을 통해 무리는 가장 강력하게 결속한다.
그리고 이렇게 각기 다른 신념은 오늘날 80억 명이 넘게 사는 지구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종교, 인종, 성, 세대, 체제, 여야, 노사 등 간의 갈등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경도된 신념을 가진 극단주의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확증편향을 일으켜 극단주의 성향을 만들어낸다는 진단이 있지만, 이는 그 과정일 뿐, 본질적 뿌리는 사람의 무리본능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우려스러운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 이러한 신념과 극단주의에 더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굳이 한쪽 편을 들지 않는 것이 유리한 반면, 약자들은 한쪽 편에 확실하게 서 무리 속에 결속되는 것이 생존에 좀 더 유리할 것이라는 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법칙에는 치우침 없이 적당한 수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많다.
유리컵에 담긴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잉크는 선명하게 유지되지 않고 물과 조화롭게 섞이며 고르게 퍼진다.
이것이 바로 열역학 제2법칙에서 설명하는 엔트로피의 증가 상태다.
우리는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밥을 먹는다.
이 세상의 모든 물리는 '균형'을 향한다.
잉크가 고르게 퍼지는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격렬한 갈등도 결국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중화될 것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사회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사회를 위한 동양의 철학, '중용(中庸)'의 지혜를 한 번쯤 떠올려 본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