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전승, 결핍, 면역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입대를 앞둔 아들을 둔 엄마라면 누구나 걱정이 있을 것이다.
'편한 환경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내던 녀석이 군대 가서 적응이나 할 수 있을까?'
결혼을 앞둔 딸을 가진 아빠도 걱정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 부모의 걱정은 기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새로운 단체 생활, 규칙적 생활, 달라진 일상의 루틴 같은 것들이지만, 인류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보게 된다면,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지리적 환경'이다.
지구본이나 세계지도를 유심히 보다 보면 가끔씩 의문이 생긴다.
왜 선진국들은 북미, 유럽, 동아시아 같은 북반구의 비슷한 위도에 몰려 있을까? 그들이 대체로 똑똑하고 근면성실한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인 것일까?
왜 유럽은 일찍부터 무기와 과학기술을 발달시켰는데 중국과 아프리카는 그러하지 못했을까? 유럽인들이 보다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흔히 한국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한국인의 똑똑함과 근면 성실함을 근거로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유전자는 남녀의 성향을 가르고, 정치적 스탠스를 결정하고, 사회 문명의 토대를 만들어내지만 모든 것을 다 유전자가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원래 똑똑하다는 것은 지나친 자만심이고, 지리적 환경에 의한 높은 교육열을 통해 일시적으로 현재 똑똑해져 있을 가능성은 있다.
유전자 말고, 지리적 환경이 어떻게 문명의 차이를 만들었는지, 오늘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명저 '총•균•쇠'를 바탕으로 그 예를 들여다보자.
첫째, 유라시아는 가로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세로로 뻗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은 지구의 동서 축(가로)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같은 위도상에서는 기온, 일조량 등 기후 조건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 덕분에 유럽과 아시아에서 개발된 새로운 작물, 가축, 기술, 그리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대륙의 동쪽과 서쪽으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이는 빠른 문화 전파와 기술 공유를 가능하게 했다.
반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은 남북 축(세로)으로 길게 뻗어 있다. 이는 북극에 가까운 툰드라부터 적도의 열대우림, 그리고 남쪽의 온대 기후까지 기후대가 급격하게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한 지역에서 개발된 농작물이 기후대가 완전히 다른 남쪽이나 북쪽으로 퍼지기 극도로 어려웠다. 지구의 모양 자체가 기술 확산의 속도를 결정했던 것이다.
둘째, 풍요로운 환경은 만족을 낳고, 척박한 환경은 발전의 동력이 된다.
집에서 자라는 강아지들과 그 후손들은 집 밖을 벗어나는 순간 야생에서는 바로 생존 위기에 몰리는 약한 개체가 된다.
풍요로운 보노보보다 척박한 환경 속 침팬지의 도구가 훨씬 정교하다.
'풍요의 역설'이다.
동남아나 중남미처럼 연중 기온이 온화하고 먹을 것이 풍부한 환경은 생존의 압박을 낮춘다.
옷이나 난방 같은 생존 기술에 대한 절박함이 부족했고 굶주림의 위협이 낮았기에, 복잡하고 힘든 기술적 혁신을 시도할 동기가 약해졌다.
반면, 유럽의 혹독한 겨울이나 척박한 토양은 절박한 필요성을 낳았다. 식량을 저장하고, 추위에 맞설 정교한 건축술과 난방 기술을 개발해야만 했다.
또한, 경쟁이 치열한 분열된 지형에 살았던 유럽은 외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험과 전쟁과 기술 혁신을 유일한 생존 전략으로 삼았다. 적절한 결핍과 경쟁은 잉여 자원을 창출하고 재투자할 동력이 되었다.
셋째, 지리적 환경에 따라 동물이 달라지고, 동물의 가축화는 질병에 강한 면역력을 생성시킨다.
문명 발달에 필수적인 대형 포유류의 가축화는 유라시아 대륙의 압도적인 지리적 행운이었다. 유라시아는 소, 말, 돼지 등 가축화에 성공한 대부분의 동물을 보유했다.
인간은 이 가축들을 밀집해서 기르는 과정에서 가축 유래의 수많은 병원균(천연두, 홍역 등)에 수천 년간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다.
이러한 오랜 병원균과의 공존은 유럽인들에게 부분적인 저항력과 유전적 내성이라는 '면역 유산'을 남겼다.
반면, 아메리카 대륙은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이 거의 없어 이 '면역 유산'이 전혀 없었다.
결국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유럽의 질병은 유라시아의 지리적 행운이 만든 강력한 생물학적 무기가 되어 아메리카 문명을 붕괴시켰다.
맨 앞으로 돌아가,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
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은 조금 더 프로페셔널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평생을 책임지고 영원히 같이 살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미 힌트는 나와 있다. 비슷한 위도에 사는 사람들끼리의 빠른 문화 전파, 적당한 결핍이 만든 척박한 환경, 함께 지내는 동물들로부터 축적된 면역력. 이 모든 지리적 요인들이 오늘날의 번영을 낳았다.
꼭 자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발전시키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를 적용시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혜를 전달하고, 결핍을 주며, 강한 면역력을 키워주는 것.
인류 문명이 발전해 온 그 방식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