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지혜와 새로운 질문 사이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80세인 어머니가 50세 아들에게 여전히 잔소리를 한다.
“술 너무 마시지 마라”,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
공상과학철학자의 어머니 이야기다.
또 공상과학철학자는 너무나 사랑하는 17살, 15살 딸들의 행동이 가끔씩 이해 안될 때가 있다.
웃기지만, 이 장면은 인류 역사 어디를 펼쳐도 반복된다.
5천 년 전 수메르 점토판에는 이미 젊은 세대의 무례함과 나태함에 대한 기성세대의 탄식이 새겨져 있다.
플라톤조차 “청년들은 절제하지 못하고 기성세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한탄했다.
세대 간 갈등은 현대의 단편적 현상이 아니라, 최소한 인류 문명 초기 시절부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 보편적 패턴의 뿌리는 생물학에도 닿아 있다.
대부분의 생물은 번식이 끝나면 오래 살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수벌이나 수개미는 교미 직후 죽고, 연어는 산란을 끝내자마자 생을 마무리한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넘기면 '역할이 끝난' 것으로 처리되는 생명 설계이다. 그런데 인간은 유독 번식이 끝난 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산다. 왜일까?
진화생물학은 이를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로 설명한다. 인간의 긴 생존은 기성세대가 가진 두 가지 결정적인 '쓸모' 덕분이었다.
하나는 육아 도움이다. 할머니 세대의 육아 참여는 손주들의 생존율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다른 하나는 지혜 전승이다. 사냥과 채집을 하던 시절, 경험 많은 어른들이 축적한 지식, 즉 생존에 직결된 '지혜'는 공동체의 필수 자본이었고, 이 지혜는 연륜과 비례했다. 그래서 인간은 '번식 이후 긴 생존'을 선택압으로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교의 효나 장유유서와 같은 가치들은, 힘이 떨어진 노인일지라도 그들을 공경하고 잘 대우해 주어야 사회 전체의 유전자가 생존해 나가기 유리하다는, 타당하고도 본능적인 가르침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 지혜의 축적에 관한 상황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육아 도움은 여전히 의미 있지만, 지혜의 우위 면에서는 예전과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주장하기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정보가 희귀하고 불완전했기에 연륜이 곧 지혜이자 권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식의 반감기가 극단적으로 짧아졌다. 기술은 하루 단위로 변하며, 인터넷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기억보다 더 정확하고 빠르게 최신 정보를 제공한다.
기성세대가 오랜 세월 축적한 지식은 빠르게 "쓸모없는 옛것"으로 치부된다. 할머니 가설의 중요한 두 가지 역할(육아 지원 + 지혜 전승) 중 하나가 붕괴된 것이다. (일본 경제 침체의 근본 원인 역시 바로 옛 방식에 대한 집착, 장인정신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로 인해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존경을 기대하는 유교식 공경 규범 역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존경은 이제 나이가 아닌, 배움의 자세와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통해 얻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성세대가 젊은 전문가들에게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야말로, 급변하는 시대에 존경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가치 변화 속에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특히 40~50대를 향한 ‘영포티’와 같은 공격적 프레임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는 조금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일부의 잘못된 행태를 전체 세대의 특성으로 일반화하는 오류가 있다.
둘째, 40~50대는 생각처럼 그렇게 낡은 세대는 아니다.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지능의 확산을 모두 직접 경험하며 기술 격변기를 겪어 온 첫 세대이다.
셋째, 인생은 기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마라톤을 여러 번 뛰어본 사람이 페이스 조절 노하우를 몸으로 알듯, 젊은 세대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체력과 호흡을 조절하는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오늘날 젊은 세대의 분노에는 기성세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조적 원인이 더 크다. 자본의 집중, 자동화, AI의 노동 대체, 저성장의 장기화 같은 문제는 모든 세대가 함께 겪는 거대한 문명의 전환기적 위기에 가깝다.
세대 갈등은 구조적 문제를 잠시 잊게 해주는 감정의 표출일 뿐, 서로를 비난해 봤자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옛 지혜는 빠르게 낡아가고, 새로운 지식도 곧 유효기간이 지나간다. 그렇다면 진짜 지혜란 무엇일까?
우리가 함께 이룩할 새로운 사회 구조는 어떤 모습일지, 어떤 경험이 시대의 생존율을 높일지, 그리고 세대를 넘어 전달할 가치가 무엇일지.
아마 그 질문을 놓치지 않고 고민하며 지혜의 새로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지혜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서로를 다시 연결해야 한다.
단절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의 다름을 매개로 새로운 배움을 만들어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