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에 오르는 민주주의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한이 표방하는 공식 국호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북한도 나라 명칭에 Democractic, 즉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콩고민주공화국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민주주의 체제이건 아니건 간에, 사람들 입장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무척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주인이고, 주권을 가지고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민주주의는 '대체로' 좋은 시스템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완벽한 시스템은 아니다.
오늘은 민주주의의 명암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만능의 집단지성?
어느 날 지름 1km에 달하는 거대한 소행성이 한반도의 충청북도 부근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대로 충돌한다면, 한국은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만다. 다만 중국과 일본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 오직 한국인에게 사활이 걸린 일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여러 가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미사일로 요격합시다."
"소행성에 착륙해 핵폭탄을 심고 터뜨리자."
"모두 지하철 같은 곳으로 대피해야 합니다."
"가용한 수단을 총 동원해 국민들을 이웃 나라로 대피시켜야지!"
결국 정부는 과학자들을 소집해 소행성에 중량물을 충돌시켜 궤도를 살짝 바꾸는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했고, 다행히도 소행성은 무사히 지구를 비껴 지나갔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보자면 결국 문제를 해결한 것은 사람들의 집단지성이 아닌, 뛰어난 몇몇 과학자들의 전문 지식이었다.
집단지성은 위와 같은 한계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독일의 나치즘을 보자. 아돌프 히틀러는 쿠데타 등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되었고, 수많은 독일인이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민주적인 절차는 결과적으로 아무 죄 없는 유태인 600만 명을 죽게 만들었다.
둘째, 민주주의는 유전자적 본성과 달라 보인다.
무리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동물 사회에는 알파 우두머리가 존재하며, 나머지 무리는 그 우두머리를 따르도록 본능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정, 봉건제, 양반제 등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형태가 수천 년간 지속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투표를 통해 권력을 위임하게 된 시기는 불과 100여 년 남짓이다. 스위스에서는 1971년이 되어서야 여성도 마침내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 문명 전체의 시간표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아직도 수명이 짧고 그 결과를 단정할 수 없는 급진적이고 불안한 실험에 가깝다.
셋째, 공공의 선보다는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다.
새로운 쓰레기 매립지를 어디에 설치할지에 대해 서울시민과 인천시민에게 의견을 물어 정한다면, 쓰레기 매립지는 아마도 인천에만 계속 지어질 것이다. 1천 년이 흐르면 인천은 쓰레기 매립지 천지가 되고, 인천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 여론에서 밀리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공공의 선보다는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한계인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넷째, 단기 비전과 인기 영합주의
4년, 5년마다 새롭게 선거가 치러지는 민주주의의 특성상, 장기적 계획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게 된다.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르는 토성 탐사를 위해 상당 비율의 예산을 우주 개발에 쓰겠다고 공약하는 대통령 후보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선진국들은 대부분 제도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장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개개인이 주권을 가지는 특성 덕에,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수가 원하는 정책을 경쟁한다. 정책과 정치가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또 소행성을 피하는 방법과 같은 전문적인 지식에는 민주주의가 한계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 예를 들면 도로를 놓아달라는 것, 근로 기준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해 달라는 것 등에 대한 요구는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큰 힘을 얻는다.
그리고 집단지성이 가끔씩은 히틀러를 투표로 선출하는 오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더 옳은 결정을 내린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성도 결국에는 생존의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지성이 모이면 생존에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한 명의 독재자가 내리는 결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내리는 결론이 '대체로' 더 맞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교정하는 '오류 수정 장치'인 것이다.
이렇게 수십 년간 세계의 대세가 되어 온 민주주의에, 최근 수년 전부터 강력한 도전자가 등장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향후 AI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백만 가지의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고, 인간의 감정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없이 가장 논리적이고 효율적인 최적의 판단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당신은 본격적인 다이어트를 식단을 시작하기 위해, 또는 맛있는 김치찌개를 만들기 위해, 여러 지인들에게 의견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AI를 활용할 것인가? 일상적인 선택의 영역에서 이미 AI는 집단지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AI는 쓰레기 매립지의 위치를 결정할 때도, 예산 분배를 정할 때도, 나치즘과 같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도 논리적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
AI의 지능이 인간의 집단지성을 압도할 때, 우리는 이 AI의 선택을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보완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봐야 할까, 아니면 인간의 주권이 사라지는 AI의 독재로 간주해야 할까?
미래가 무척 궁금해진다. 20년 후쯤의 정부는 정책을 결정할 때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AI에 대폭 의존하게 될까? 그저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과 같은 세상이 되지는 않기만을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