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서 살아남기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 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지능의 상당 부분을 인공지능과 로봇이 담당하게 되는 미래 사회에서, 인간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게 될까?
인간을 구원하려는 글이 아니다. 또 인간이 특별하다고 주장하려는 글도 아니다.
다만 효율과 기술이 극단까지 밀려갔을 때,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어떤 방식으로 적응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가정해 보는 사고 실험이다.
앞으로의 인류는 지능이 아닌 다른 성질들에 대해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동물적 본능이다.
AI에게는 이러한 본능이 없다.
첫째 먹이.
AI는 최적의 식단을 설계할 수는 있지만, 음식을 먹지 않는다.
요리들의 온기, 냄새, 질감, 그리고 그것이 신체에 남기는 감각을 실제 느낄 수 없다.
모든 생명체의 본능 먹이. 미래 사회에서는 단순한 영양 섭취가 아니라 미식과 건강식 관리 같은 감각 중심의 먹는 경험이 중요해질 것이다.
기후위기로 식량난이 심해질수록 생물체 본연의 먹는 것에 대한 가치는 올라간다.
둘째 감정.
인공지능은 감정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감정을 겪지는 않는다.
그리고 편리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외로움, 권태, 무기력, 불안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는 '이성'다는 '감정'이 중요해지는 세상이 올 것 같다.
외로움을 달래고, 심심함을 없애주고,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불안을 잠재워주는 행위들이 각광을 받을 것이다.
결국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유대 속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이 모이는 공간, 이를테면 카페, 술집, 클럽, 광장 등 사람은 사람이 모이는 공간으로 향할 것이다.
셋째 신체.
인공지능과 로봇은 아직까지는 부드러운 피부와 체온을 가진 유기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감을 느끼고 관절과 근육을 사용해 몸을 움직이는 일은 인간과 같은 동물들의 중요한 고유 영역일 것이다.
그래서 운동과 같은 신체활동, 스포츠 참여, 성적 쾌락, 요가, 댄스, 질 좋은 수면과 같은 신체와 관련된 일들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리라 보인다.
이런 인간적 경험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방향은 언제나 효율을 향해 움직여 왔다.
이 흐름을 끝까지 연장하면, 인공지능과 로봇은 결국 인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외형과 피부 질감, 체온, 움직임을 가진 휴머노이드로 수렴하게 되지 않을까? 동시에 그들의 지능은 인간의 수천, 수만 배, 물리적 힘과 정교함은 수배, 수십 배에 이를 것이다.
인간 역시 기계와 점점 결합해 갈 것이다. 인공 심장, 인공 관절은 이미 현실의 기술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만약 휴머노이드가 AGI, 즉 범용 인공지능 수준의 판단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환경을 관리하게 된다면,
인간은 그 시스템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까?
이것은 아직 가정이다.
AGI가 자의식을 가질지, 사회적 목표를 설정할지는 아무도 확정할 수 없다.
하지만 기술의 방향을 극단까지 밀어붙였을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시간이 100년 걸리느냐 1000년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 인간을 모든 면에서 압도하는 주체적인 휴머노이드가 안 나올 가능성이 오히려 희박하다.
만약 인간이 지능과 신체 능력 모두에서 휴머노이드보다 열세가 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사회의 중심 주체로 남기 어려울 텐데, 이 경우 인간은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역할’을 맡는 방향이 아니라, 시스템이 허용하는 자리로 배치된다면?
1) 휴머노이드 세계의 인프라를 유지하는 생물자원
휴머노이드는 고도의 판단과 계획에는 탁월할 수 있지만, 막대한 수의 분산된 물리적 노동을 수행하는 데에는 여전히 생물학적 존재가 효율적인 경우가 있다.
이때 인간은 휴머노이드가 설계한 세계를 실제로 구현하고, 유지·보수·확장하는 데 필요한 노동 자원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의성이나 의사결정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 순응성, 교체 가능성이다.
인간은 더 이상 세계를 설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계속 손을 대는 존재가 된다.
지금 말과 낙타와 소가 많은 개체수를 유지하며 번성하고 있듯 말이다.
2) 호기심을 자극하고 귀여운 반려 생명체
또 다른 가능성은 인간이 노동력이 아니라 관찰과 교류의 대상으로 남는 경우다.
휴머노이드의 세계는 완벽한 효율과 예측 가능성 위에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그 환경에서는 불완전성, 감정의 기복, 비합리성 자체가 희귀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효율적이어서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해서, 쓸모없어서, 이해되지 않아서 유지된다.
인간이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력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감각과 정서적 자극을 얻기 위해서다.
후손들이 밈으로 전승받을 수 있도록 귀여운 표정과 행동을 연습해 두자.
3) 꿀벌과 지렁이 모델, 인간이 지구에 도움이 되는 경우
인간이 나무를 심고, 제방을 보수하고, 적은 인구수를 유지해 다른 생물종을 극단적으로 해치지 않으면서 지구 생태계에 도움을 주고, 휴머노이드에게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해준다면 어떨까?
휴머노이드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더라도 인간을 굳이 없애는 것보다는 놔두어도 괜찮다고 판단할지 모른다.
하지만 쾌적하고 편리한 생존을 추구하며, 다른 종을 제압하고 환경을 개발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과연 지구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휴머노이드가 그렇다고 판단할지 회의적이라고 판단할지는 잘 모르겠다.
4) 흰 쥐와 초파리, 생체 실험 대상으로서의 번성
이 부분은 독자 여러분이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환경에 계속 적응해 오며 변화해 온 인류.
인공지능 시대에도 우리는 계속 적응하고 변화할 것이다.
지능과 효율이 더 이상 인간의 강점이 아닌 시대에, 인간은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질 이유도 없다.
문명이 효율을 극단까지 밀어붙일수록, 인간은 점점 목적이 아니라 환경의 일부가 되어 좀 더 생물체의 본능에 충실해 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퇴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적응과 변화가 아닐까?
사람들은 가끔 먹고 놀고 자는 자신의 신체 메커니즘이 고양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가끔씩 잊어버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