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깍지> 1_#07_스포츠와 게임의 역설(3) : 아내가 결혼했다
- 결말은 감췄지만,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은 소설이나 영화를 먼저 보시는 게 좋아요.
- 영화처럼 글의 내용도 일부 19금이에요.(보기에 따라서는요.)
바르샤와 축구
그녀는 FC바르셀로나를 바르샤라고 부른다. 밤을 새워 유럽 클럽 축구를 관전하고 골수팬들이나 아는 애칭으로 자신의 응원팀을 칭할 정도의 스포츠 매니아라니, 이 여자의 매력은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다. 그것은 너무 차고 넘치는, 즉 너무 지나치게 매력적이어서 부담스러운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뭐랄까.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매력의 어떤 최고치가 있었다면, 이 여자는 아예 매력이란 것의 새로운 기준과 조건을 제시하며 매력의 신세계를 일깨워 준다고나 할까?
모든 남자들이 잘해줄 수밖에 없는 여자란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춘 여자이리라. 예측할 수 없는 매력을, 말하자면 미처 기대해 보지도 못한 매력을 제공하는 능력을 갖춘 여자. 일단 외모가 받쳐줘야 밀당 놀이동산의 입장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부디 이 여자에 주목하라. '어차피 나는 속물'이라는 정체성에 얽매인 가련한 영혼들의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하는 숨은 욕구를 깨우쳐다오. 깨우친 이는 열광할 것이다. 그래 사실 난 이런 거 좋아해. 사실 난 이런 대화를 원했어! 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름을 불러달라는 것.
누구든 '그저 예쁜 꽃'에 반하기보다 나를 '꽃'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에게 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런데 아마도 그런 기적(나는 꽃이 되었어 @ㅇ@)을 실감하며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었을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스포츠 매니아가 아니다. 그녀는 그냥 바르샤가 좋을 뿐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을 통해 독재자에 끝까지 저항했던 바르셀로나의 역사에 감동 받았고 바르샤(FC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의 그 고결한 정신을 잇고 있는 클럽이라 믿고 있기에 그들의 경기에 열광하는 것.
때문에 그녀는 의리를 저버리고 레알로 이적한 피구가 괘씸하다. 그리고 프로의 세계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비웃는 남자에게 승부 이전에 정신과 신념이 중요한 것 아니냐며 정색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승패가 갈리는 냉혹한 룰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에 임하는 이들의 정신과 신념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 매니아든 아니든 이미 남자는 그런 건 관심 없다. 그저 이 경기를 계속 이어 나가고 싶을 뿐. 그리하여 남자는 승부를 떠나 진심으로 혼신의 힘을 다 해 그녀를 향한 드리블을 이어간다. 그리고 승부 이전에 '정신과 신념'을 중요시한다는 이 여자는 남자의 그런 진심을 가상히 여겼는지 연장전을 제안한다.
최고의 성적 판타지
개인적으로 가장 예뻤던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이 장면이다.(이 장면은 아마 소설엔 없었던 것 같다.) 한창 사랑하는 사람과 헐벗은 자세로 뒤엉켜 '섹스의 동의어 말하기' 게임을 하는 장면. 동의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지는 것이고, 지는 사람에겐 5분 동안 애무 참아내기의 벌칙(?)이 주어진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 벌칙도 벌칙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몸을 가지고 그토록 다정하고 친밀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지.
돌이켜보면 우리의 섹스는 늘 지나치게 흥분되어 있거나, 긴장하거나, 의무감에 시달리거나, 눈치를 보거나, 조심스럽거나, 심지어는 미안해하거나 괜히 경건해지곤 했던 것이 대부분 아니었던가. 나는 왜 '5분 동안 애무 참기'와 같은 벌칙을 걸고 '섹스와 동의어 말하기'와 같은 게임을 제안해 보지 못했을까. 아마도 섹스와 관련된 금기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내 강박이 늘 섹스 앞의 날 지레 겁먹게 한 것이었겠지. 내 관심이 혐오 당할까 봐. 내 욕구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봐.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여인은 남정네에게 묻는다.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의 성적 판타지는 뭐야?" 하고. 변태처럼 보일까 살짝 두려운 남정네는 물론 망설이며 농담처럼 너스레를 떨어 본다. "왜, 말하면 들어주나?" 한 수 위 여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기꺼이." 의외의 대답에 신이 난 남자는 가열차게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야한 아이디어를 동원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판타지를 쭈뼛쭈뼛, 그러면서도 조목조목 설명해 본다.
하지만 역시 한 수 위인 여인은 남정네가 어렵게 설명한 체위를 전문용어 한 마디로 정의함으로써 마지막 한 올 남은 남정네의 수줍음마저 걷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또 없어?" 마침내 남정네는 은근히 호승심까지 발동시켜가며 '어쭈, 좋아 진짜 진실을 말해주지.'하는 식으로 남몰래 꿈꿔왔던 자신의 판타지를, 이번엔 정말 진심을 드러낼 때의 쑥스러움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한다.
어째서 이 커플의 대화는 변태스럽기는커녕 이토록 사랑스럽기 그지없는가. 서로의 몸에 상냥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기대어 그 안락함 속에서 서로를 즐겁게 하는 자극을 주고받는 놀이. 긴장과 경계 없이도 이 알콩달콩한 놀이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할 것 없다. 우리의 문제적 개인, 우리의 주인공 주인아 씨가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여 게임에서 승기를 거뭐쥐니까.
섹스의 다른 말로 '빠구리', '박다'와 같은 저렴한 단어를 대가며 분위기를 압도하려던 덕훈이 결국 다른 단어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할 때 인아는 고결한 황새의 한가로운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사뿐히 말하는 것이다.
"사랑"
섹스, 정사, 성교, 자다, 그짓, fuck, 떡, 빠구리, 씹, 박다, 동침, 그리고 뒤치기는... 특정 체위라서 낄 수 없는, 이 말들의 동의어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너에게 몸을 포개는 내 몸짓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기에, 너 또한 사랑으로서 내 몸에 포개어짐을 믿고 있기에, 서로를 맡긴 두 사람 사이엔 긴장도, 의무감도, 눈치도, 괜한 경건함도 필요 없을 터. 다른 건 몰라도 섹스에서만큼은 무능해지고 싶진 않은 이들이여, 상대방이 상냥하고 편안하며 그 와중에 똑 부러지는 임팩트까지 있는 우아한 섹스를 원할 것이라는 추측은, 물론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나 결국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은 오직 '사랑'임을 잊지 말지어다.
나, 자기 사랑하는데 자기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말 한다. 너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누구나 쓰라린 연애의 실패를 경험하고 후회하며 스스로 깨달아 본 적이 있을 이 사랑에 관한 경구(警句)는, 그러나 막상 상대방에게 대놓고 듣자면 몹시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진리나 진실이란 것들이 원래 까놓고 보면 다 무겁고 쓸쓸한 것들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그 무겁고 어두운 쓸쓸함을 위로하기 위해 서로에게 거짓말을 건네는 것으로 '예의'를 차린다. 그런데 주인아 이 여자는 그게 없다. 이 여자의 얘기는 앞뒤 안 맞는 것이 없지만 분통 터지게 예의가 없다. 그리하여 그는 갈등하고 의심한다.
어째서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가 원하는 거짓말을 해주지 않는가? 어째서 나를 사랑한다면서 나만 사랑하겠다는 거짓말도, 나 이외의 이성은 만나지 않겠다는 희생과 절제의 약속도 하지 않는가? 방해받고 싶지 않아 전화기를 꺼놓았다고? 어째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나보다 자신의 시간이 더 중요한가? 나보다 자기 가 더 중요한가? 나를 사랑한다면 자기보다 내가 더 소중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난 그런데. 난 사랑하는 너를 위해서라면 내 시간도 바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희생과 절제의 약속도 할 수도 있고, 너만을 사랑하겠다는 말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확신어린 희망을 담아 무작정 할 수 있는데. 너는 어째서 그렇게 해주지 않는가! 어째서 너는 그렇게 너밖에 모르는가!!
그러나 그녀는 "둘 중 하나라도 행복하지 못하면 둘 다 행복할 수 없는 게 연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랑과 연애가 자기 환멸이나 자해공갈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예의'를 위해 '마음'을 버릴 수 있던 말인가. 난 분명히 너를 사랑하고 있고 그 마음이 변치 않았는데 어떤 타당함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놈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끊임 없이 사랑을 의심하는 그가 그녀는 힘겹고 안타깝다.
그러니 그녀를 포기할 수 없는 그는 어쩌겠는가. "결혼이란 연애의 무덤" 이란 격언을 믿을 수밖에. 그러하여 그는 그녀에게 사랑에 대한 예의로는 그 준엄함이 지극하기 이를 데 없어 특히 한국에서는 장례와 함께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의 쌍벽으로까지 여겨진다는 결혼을 조르기 시작한다. 만인 앞에 나의 아내임을 공인 받고 나면 너도 어쩔 수 없으리라. 날 사랑하지만 내 것은 아니니 너의 자존을 지키며 살아 가겠다며 네 마음의 자유나 새로운 사랑에 대한 가능성을 계속 열어놓지는 못하리라.
너도 사랑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을 수 없으리라.
안돼. 그건 다 거짓말이잖아.
그러나 우리의 여주인공은 기어코 그를 더 깊게 시험한다.
"내가 하늘의 별을 따 달래, 달을 따 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것뿐인데."
그녀도 그녀지만 남편의 존재를 알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그놈도 그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항의한다. 말도 안 된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사랑의 예의를 넘어서 이건 인간의 예의를 넘어서는 일이다.(두유노우 인륜지대사?) 하지만 그런 말이 예상했던 대로 안 먹히는 지라, 차라리 동거를 하라고 하소연을 해도 그녀는 완강하다.
차라리 거짓말을 해라! 아니 제발 거짓말을 해다오! 그게 예의다! 사랑하므로 내게 진심만을 고백하고 그걸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니.그건 사랑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사회적 합의에 대한 반발이며 무엇보다 불법이다!
그러나 온갖 종류의 예의와 사회적 합의와 심지어는 법마저도 인아의 진심을 꺾지는 못한다. 결국 온갖 종류의 예의와 사회적 합의와 법의 타당함을 신뢰하며 살아온 그는 그녀에 대한 예의와 사회적 합의와 법적인 권리 모두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녀에게 그 모든 것들의 타당함을 납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기의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결혼과 관련된 그 모든 공인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상식을 지켜내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참아왔던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조롱과 모독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 그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하지만 이 불가피한 선택이 그는 억울하기 그지없다.
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단 말인가. 이혼으로 자신의 상식을 지켜낸 다고 해도, 그는 결코 좋을 것 같지 않다. 결국 못 참고 현장을 덮친 그는 오열하고 악을 쓰며 이혼 서류를 찢어 버린다. 그리고 결혼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던 공인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그 권리들에 대한 자신의 상식을 포기하고, 그녀의 진심은, 아니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진심은 포기하지 않는, 나머지 다른 하나의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룰을 송두리째 포기한 상처 때문에 그는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며 그들의 집에서 나와, 비틀거리며 터미널의 버스에 오르고, 비틀거리며 집에 도착해 비틀거리며 침대에 몸을 쏟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말없이, 슬픈 눈 으로 따라온 그녀. 그녀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망신창이가 되어버린 남자를 위해 밤을 새워 조용히 그리고 정성스레 그가 예전에 들뜬 표정으로 고백하던 판타지를 실현시켜준다.
하나를 반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두 배가 되는 게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서울과 경주의 두 집, 뿐만 아니라 양가의 시댁까지 오가며 그녀는 아내로서의 대내적 책무와 대외적 책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낸다. 자신의 외계인 같은 사랑을 뿌리치지 않은 두 남자에 대해 그녀의 방식으로 예의를 지켰달까?
물론 아무 것도 모르고 참한 며느리로만 그녀를 아끼는 시댁식구들에게야 거짓말을 하는 셈이지만, 어차피 결혼-혹은 인륜지대사라는 미명 아래 거짓말의 희생자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결혼을 통해 사랑하고자 하는 당사자들보다는 당사자들의 진실을 이해하기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거짓말을 믿고 싶어 할 이들이 그 역할을 맡는 게 낫지 않을까. 사랑과 결혼에 대해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다면 오히려 이런 식으로 지켜져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녀는 똑소리 난다.
그리하여 그가 도전하는 마지막 승부, 그가 노리는 마지막 골, 바로 아기. 피가 섞인 자손을 공유하는 순간 더는 이 여자도 나만 의 여자가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임신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에게 마지막 시험이 도래한다.
왜냐고? 왜냐고?!! 왜긴! 인간이라면 당연하지. 도킨스도 그랬잖아. 생물은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 확장하려는 이기적 유전자의 거대한 도구일 뿐이라고. 인간도 생물이니까 원시적 본능에 근거하여 핏줄에 집착하는 건 지극히 타당한 일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그 절대적인 문제마저도 절대적으로 공인된 해답으로 풀려고 하지 않는다. 두 남자의 아내로 사는 것이 사랑을 반으로 나누는 일이 아니라 두 배로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오히려 배신감에 가득 차 씩씩대며 자기 아이가 아니면 사랑할 수 없다는 거냐며 따지고 든다.
그래!!!! 아니, 그래. 그런가? 내가 하고자 하는 사랑은 원시적 본능의 확인일 뿐인가? 난 내 사랑의 타당함을 유전자 복제라는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면 증명할 수도 지킬 수도 없을 것인가? 그렇다면 난 인간의 사랑에 닿지 못하고 단지 원시적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인가?
갸우뚱 하는 사이 아이는 자라고, 어른은 적응을 한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찾아온 배신
역시 이대로 밀려날 수는 없다.
증명을 해야만 한다.
그녀는 내 아내이고
어느덧 돌을 맞이한 저 아이는 내 아이라고!
한국 축구의 문제점
한국 축구의 문제점은 뭘까? 그는 '누구나 다 아는 걸 뭐 하러 질문 하냐.'는 듯이 심드렁하게 답한다. '골 결정력 부족'이라고. 하지만 질문자의 입을 통해 영화는 말한다. 한국 축구의 문제는 축구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 이라고
결혼의 문제점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겠는가. 사랑하기 위해 함께, 그 사랑을 물려주고 이어가기 위해 다시 함께, 우리는 연애를 하고 마침내 결혼을 하여 가족을 이루는 것일 텐데, 사랑하여 만난 우리는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상대의 마음에 혹은 나의 마음에 마음 놓고 안주할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결혼이라는 이름의 약속을 해왔다.
그리고 그 약속을 전제로 비롯되는 수많은 기대와 조건을 묵인하게 되는데, 우습게도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결혼의 성공을 증명하려 그 모든 것들의 성취를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 어느덧 사랑은 잊고 승부가 되어버린 온갖 삶에 집착한다.
물론 '폴리아모리'라는 위악적(?)인 설정은 아직 우리에겐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노덕훈(그)의 절규를 어루만지는 주인아(그녀)의 또랑또랑한 말대답에 치를 떠는 우리들이야말로 그동안 우리들의 사랑에 얼마나 많은 반칙을 해왔던가.
혼자라는 걸 회피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오로지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 마음 놓고 징징대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내게 부여된 생물학적 의무를 실현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기 위해서, 정작 사랑은 도구로 이용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것이 정녕 사랑에 대한 예의일까? 혹은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예의일 수는 있을까? 우리의 결혼은, 그리고 결혼을 둘러싼 우리의 생각은 충분히 사랑에 예의바른가?
아내의 결혼을 받아들이며 쓸쓸히 어린 날의 운동장을 추억하는 덕훈의 독백은 어른이 되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짚어낸다.
"어릴 땐 날마다 공을 찼다. 더워도 추위도 상관없었다. 골대도 운동장도 필요 없었다.
내게 필요했던 건, 오직 공, 하나."
몰상식을 넘어 비현실적인 인아의 요구를 기어코 실현시키는 것은, 바로 그녀를 사랑하는 두 남자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두 남자의 사랑을 놓치지 않을 만큼 진실하고 성실한 그녀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을 참아내며, 그리고 마침내는 극복해 내며 그녀와 함께 하려는 두 남자의 몸부림은 '그녀의 삶을 위해 내 삶을 대신 내 놓으리~'하며 눈물 콧물 짜내는 〈if only〉류의 설정에 비해 얼마나 감동적이고 치열한 사랑의 실천인가.
" 사랑한다면, 사랑을 해라." 이 영화가 주인아라는 역설을 통해 건네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스포츠든 게임이든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룰이 아니다. 축구가 좋다면 축구를 즐겨라. 즐기지 못한 자가 패배자인 것이다. 축구가 좋아 함께 공을 찼다면 누구도 패배자는 아니다. 그러니 우린 사랑을 동기로 시작된 우리 삶의 모든 묵직한 일들, 결혼도, 육아도, 연애도, 다툼도, 삐짐도, 헤어짐도, 만남도, 그리고 섹스도, 부디 사랑으로 즐길지어다.
설사 그 모든 일들이 결국 당신이 원하는 골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폐허처럼 쓰라린 운동장일지라도
후회없는 추억이
다시 공을 차고 싶은 용기가
언제고 다시, 푸른 잔디로 자랄 테니까.
다시 몰두하고 환호하는 눈부신 경기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인연을 넘어 당신을 찾아올 테니까.
* 감히 김춘수의 <꽃>을 인용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