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변에서 만난 건축

- 건물을 통해 내 속마음을 들켜 버리고 말았다

by doctor flotte

아내가 좋아해서 서해 고사포 해수욕장에 종종 간다. 매년 한 번씩은 꼭 오는 것 같다. 아내는 그곳에 있는 캠핑장과 야영장 숙소를 참 좋아한다. 바다 가까이에 있어 바다도 보고 노을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도 좋아하는데 특히 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에 가서 가게 주인이 키우는 작은 강아지가 아직도 있는지 보고 싶어 한다. 가게 주인이 앉아 있는 계산대 바로 뒤편에 작은 방이 붙어 있는데 아이와 함께 몰래 찾아보니 이번에는 그 방 안에서 강아지가 조용히 자고 있었다. 물론 나도 고사포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정확히는 고사포 해수욕장을 간다고 할 때 제일 먼저 생각이 나고, 가면 꼭 한참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오는 어떤 건물이 있다. 나는 그 건물을 내 꿈의 연구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만 알고 있는 이름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돈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나는 이 건물과 똑같은 내 연구실을 짓고 싶다. 여기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말이다.


정확히 그 건물이 어떤 용도인지는 알 수 없다. 해변 안내지도에도 아무런 표시가 없고,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아무런 정보가 없다. 몇 년 전 처음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그 건물을 봤을 때부터 더 이상 관리가 안 되는 버려진 건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해수욕장 모래사장 위에 세워진 것을 보니 사유물은 아닐 테고 바다나 바다의 기상을 관측하는 시설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구조대원들이 해변의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머무는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급한 경우 바로 출동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이 건물에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하나 뿐이다. 칠이 벗겨진 정도를 보니 아주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 분명 어떤 명목으로 예산을 따서 형식적으로 건물을 지어 놓고 실상 쓸모도 없고 관리나 인건비에 돈이 드니 담당 공무원들끼리 서로 일을 떠밀다가 어영부영 그렇게 버려진 공공건물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왠지 이 건물이 마음에 든다. 갖고 싶고 그 안에 살고 싶다.


공공시설로 지어졌을 이 건물을 자세히 보면 불필요하게 세련된 건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설계자는 마치 지금처럼 버려져도 홀로 아름답고 세련된 모습으로 남을 건물을 의도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각진 네모들이 단순하지 않다. 건물 전체는 정면이나 측면이 모두 정확히 네모인데 비스듬하게 건물을 둘러보면 정면의 네모와 측면의 네모가 더없이 완벽한 비율로 세련된 입체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층에 기둥을 세워 빈 공간으로 두고 건물을 한 칸 위로 띄워 올린 것도 건물의 실용성보다는 건축미에 신경을 쓴 흔적이다. 일층의 빈 공간은 기둥으로 인해 아무 쓸모 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설계자는 그걸 의도했던 것 같다. 빈 공간으로 이번에는 텅 빈 네모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극단적인 네모형태의 창문들은 제 역할을 하면서도 미적인 기능을 숨기지 않는다. 작은 직사각형의 길쭉한 창문들은 시멘트 벽면의 단조로움을 파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제일 위층에 보이는 큰 창문들은 실내로 빛을 들어오게 하는 기능도 하겠지만, 벽면에 그려 놓은 그림처럼 회색빛 건물에 스며들어 있다. 창틀이 과하지 않고 유리의 색깔 역시 깨끗한 검정색으로 선택되어 있다. 건축가는 처음부터 에어컨 실외기를 신경쓰지 않았으니 실외기가 지금처럼 저기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건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고 있었던 내 꿈의 연구공간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건물의 크기와 구조, 색과 창문의 모양이 먼저 멀리서 지나가던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에서 이 건물을 몇 번이고 둘러보며 그 크기와 구조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나 본 것 같은 무의식 속의 내 연구공간을 만난 것 같았다. 건물을 통해 내 속마음을 들켜 버리고 말았다.


꿈의 연구실1.jpg
꿈의 연구실2.jpg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27화살냄새와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