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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냄새와 철학

-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by doctor flotte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는 진짜 철학자가 된다. 오래전 아이가 태어났던 첫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꿈틀거리며 울던 작은 맨몸의 생명체는 그 자체로 내가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없지만 그런 상태로 내게 주어져 내 일부가 된 내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내 아이와의 첫 만남은 내가 완전히 무엇엔가 압도되는 난생 처음 겪는 사건이었다. 이것을 내가 철학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니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짜 철학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정말 그 안에 살아 있는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책이나 논문에 있는 ‘자기들 말에 취한 철학’ 말고 진짜 철학 말이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내가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무한의 크기로 내가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계속 지속되거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무한’이라는 철학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경험하고 인정하고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안다는 것과 다른 것이다. 나는 무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무한이라는 거대한 크기와 힘으로 아이와 관계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지러워서 방금이라도 쓰러질 정도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압도되어 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얼마만큼 넘어선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계산할 수 없는 크기로 아이를 실제로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무한'이 되는 것이다. 진짜 무한이란 그런 것이지 끝없는 시간이나 끝없는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은 숫자와 크기로만 무한을 생각하려는 속셈에서 만들어진 것뿐이다. 무한이라는 철학적인 개념은 그래서는 안 된다.


철학적으로 어설프게 훈련된 사람들은 개념으로 생각하다가 개념과 개념의 관계에 취하게 되고 결국 중독이 되어 개념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정신나간 상태에 빠지게 된다. 개념이 원래 형식적이고 실제 삶의 모습과 운동을 지시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이 퇴화된 것이다. 삶으로부터 유리된 철학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철학교육을 보면 참 안타깝다. 철학은 삶을 이해하려는 기도와 같아야 한다. 기도는 나를 ‘마음을 열고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열린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철학이 그와 같다면 나는 삶 앞에서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내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비우고 삶이 내게 보여주는 모든 형태의 약동하는 진짜 모습들에 내 철학적인 개념들을 모두 내어주어야 한다. 나는 값싼 분위기로 철학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철학을 하자는 것이다.


아이들은 왜 항상 그런지, 뭘 먹다가 묻은 과자가루나 초콜릿을 입에 묻힌 채 작은 입을 약간 벌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낮잠을 잔다. 저렇게 자면 고개가 아플 것 같은데 깨우게 될 까봐 조심스럽다. 조용히 조용히 집중하면 잘 자고 있다는 숨소리가 들린다. 봄날 휴일 햇볕이 소파에 내리쬐고 나는 자는 아이를 본다. 지금 나는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고 아이는 인식되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행복은 ‘의심’을 통해 도달한 ‘확신’이 아니다. 이 아이는 나와 같은 ‘인격체’로 설명되어야 할 이론적 대상으로서 ‘타자’가 아니다. 이 아이의 ‘실체’는 ‘본질’로 설명할 수 없는 ‘과자를 먹다가 잠이 든 나의 사랑스러운 내 아이’이다. 그리고 냄새를 맡으면 기분 좋은 살냄새가 난다. 철학적인 본질 개념이 ‘이것을 바로 이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면 이 아이의 이마의 솜털과 이 아이의 따뜻한 체온 그리고 이 아이의 살냄새,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나의 이 행복한 멍한 상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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