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흘러갈 수 있도록
아내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아이의 시간이 있다. 가끔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화장실에 가려고 하면 거실 소파에 아내가 앉아 있다. 뭐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고 핸드폰으로 혼자 좋아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불도 켜지 않고 컴컴한 곳에서 작은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는 아내를 뭐라고 했다. 자꾸 새벽에 일어나 쓸데없는 거 보지 말라고, 눈이 나빠지니 차라리 불을 켜고 보던가 하라고 했다.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그놈의 핸드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그러는 것 같아 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밤 중에 일어나 유투브를 보던가 드라마를 보기고 하고 인터넷까페에 글을 쓰기도 하고 올리기도 하는 아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꼭 잠을 설치면서 그래야 하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는 들은채만채하고 나는 그냥 다시 자러 간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이제 학교 끝나면 혼자서도 집에 잘 오고 집에서 간식도 챙겨먹고 시간이 되면 학원도 왔다 갔다 한다. 아이의 학교 시간표와 학원 시간표를 보면 비는 시간들이 있다. 대략 4시에서 5시 사이인데 아이는 이 시간에 집에 혼자 있는 것이다. 하루 3천원을 용돈으로 주는데 아이는 학교에서 오는 길에 먹고 싶은 과자를 사 오고 집에 오면 닌텐도를 하거나 핸드폰으로 게임을 한다고 했다. 내가 조금 일찍 퇴근해 집에 오면 거실 테이블에는 빈 과자봉지가 꼭 하나씩 놓여 있었다. 아이가 태권도 끝나고 집에 오면 숙제는 하고 게임을 한 거냐고 잔소리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냥 아내의 시간이 있고 아이의 시간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집에 함께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도 아내의 시간과 아내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고 아직 한참이나 어린 저 아이에게도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는 그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쓰면 좋겠지만, 무슨 일을 하는 지와 상관없이 우선은 그냥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의 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더 그랬을 것이다.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지와 상관없이 삶의 공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가족이지만 마냥 함께 할 수 없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기분도 마음도 느낌도 있을 것이다. 아내는 어쩌면 새벽 졸린 시간, 나와 아이를 방해하지 않고 또 나와 아이한테 방해받지 않는 그런 시간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불을 켜지 않은 이유, 구석에서 작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던 이유가 말이다. 물론 아이는 그냥 엄마 아빠한테 혼나지 않고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혼자 있는시간을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이도 혼자서 자기가 마음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딱 그때뿐인 것 같다. 학교에 있던가 학원, 친구, 아빠 엄마랑 보내는 시간을 빼면 말이다. 그 시간은 아이가 자신의 '그냥 시간'을 찾고 있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서로에게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란 것이 아니라, 삶에는 우선 그냥 주어진 그런 짧은 시간과 그 시간과 함께 흐르는 작은 공간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무엇을 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든 ‘그냥 시간과 그냥 공간’ 말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사실 꼭 혼자 있고 싶어서도 아니고, 방해받을까 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우선 그냥 주어진 시간과 우선 그냥 주어진 공간이 원래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런 시간과 공간을 찾아야 하고 마련해야 하고 가족이라면 더욱 서로에게 그런 시간을 지켜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그냥 시간’과 그 아이의 ‘그냥 시간’이 그냥 흘러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