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속이는 가짜 철학자들
나는 차를 타고 공간을 이동한다. 공간 속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동한다는 것은 내가 공간 속으로 녹아들어 없어지거나 뒤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세상이라는 이질적인 공간 속의 한 사람이다. 나는 또한 공간 속에 있는 차를 운전한다. 세상 속에는 나 이외에 물건들이 있고 나는 그 물건들을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지 않을 때 그 물건들은 철저히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머물러 있다. 세상 속에는 사람들도 있다. 타인들이다. 나와 같은 인간이어서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는 내 삶을 영위하는 주인이며 평소에는 나와 상관없는 것들을 그저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헤어지면 이제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나는 세상의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온통 나와 관련 없는 것들 뿐이다. 저 물건, 저 사람은 사실 나와 별 관련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세상과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어느 날 죽게 되었을 때 혼자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확증된다. 나는 저 물건과 저 사람과 이 세상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다. 이 당연하고 확실한 사실을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철학적인 배경지식이 없거나 깊이 생각하는 연습이 모자란 사람일 뿐이다. 나와 세계 나와 타인은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치듯 얘기한다. 뻔지르르한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지향작용’ 안에서 나와 세계는 하나인 것이며, 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내-존재’이다. 나는 세상을 언제나 이미 만나고 있다는 것이며 너는 생각이 짧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혹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지평에 놓여있다는 더 멋진 말도 가능하다. 하지만 뻔지르르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진짜 삶은 철학자라는 사람들이 책으로 배운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한다. 아프기도 하고 응큼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속으로 심하게 욕하기도 하고 신께 기도하기도 한다. 내가 타인 앞에서도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타인과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피부를 뚫고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타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성질급한 오늘날 철학자들이 바로잡고자 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다. 진짜 삶이다. 아이의 순박한 장난을 보며 내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은 내가 언젠가 떠날 때에도 저 아이는 저렇게 밝고 건강하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행복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내가 붙잡을 수 없는 나와 완전히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따뜻한 위로와 힘을 얻을 때 인간은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도 물론 나와 근본적으로 관련이 없다. 내가 차를 타다 사고를 당했다고 치자. 상대방 차가 내 차에 부딪혔고 나는 다치게 된다. 교통사고는 타인과 타인의 차가 나와 얼마나 상관이 없는지를 알려준다. 타인이 몰던 차가 내 차 안으로 찌그러져 들어올 때 나는 세계-내-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갖는 본질적인 이질성의 압력에 못이겨 파괴된다. 사실은 이렇다. 나는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세계와 관련이 없다. 그게 바로 어리석은 철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나와 세계의 진정한 관계이다.
특히 현대 프랑스, 독일 철학자들, 후설의 현상학에 도취돼 쉽게 데카르트를 무시하는 가벼운 철학자들을 피해야 한다. 그들은 종이로 사람과 세상을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색칠을 한 다음 자신은 지금 인형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귀엽다고 말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뻔뻔하다. 사람이란 세상이란 글과 책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여름바다 앞에서 해가 질 때 까지 앉아 있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사실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