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1이 있고, 기다란 1이 있다
1+1=2라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수학을 싫어한다는 것이 아니다. 수학은 1+1=2라는 말의 파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1+1=2라는 것이 더 이상 의심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나는 그 말이 사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아니 나는 솔직히 ‘아주 사악한 1+1=2’라고 생각하는데 우선은 그렇게 강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다. 맞든 틀리든 감정이 섞이는 경우 항상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악하다는 것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지만, 나쁜 짓이라는 표현의 저 아래에는 어울리거나 맞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반감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 맞지 않는 어울리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비난한다. 이것은 모든 윤리의 원칙이다. 1+1=2가 사악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는 웃음도 슬픔도 감동도 절망 그리고 땀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세상은 그 계산법을 찬양하며 이제 우리는 그 계산법을 위해 인간적인 것들을 엄밀하지 않은 것,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스스로 비하하기도 한다. 왜 1에는 더하기에는 재미나 짜증, 슬픔이나 절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일까? 그건 정말이지 인간다운 것이 아니다. 그걸 의심하지 않는 우리는 인간답게 살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악한 것이 아닐까. 그 말을 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단지 하나인 것 또는 그렇게 단지 하나인 것과 하나인 것을 모아 둘이 되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 있을까?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면 두 사람이 되는 것일까? 깊은 사랑 속에는 더 완전한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서로 싸울 때에는 내 앞에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살을 먹고 두 살을 먹으면 나이가 그만큼 많아졌지만 실제로 나한테서 그만큼 많아진 것은 무엇일까? 지식이나 경험, 세상에 대한 회한이 많아졌겠지만 정말 2년 동안 1년의 두 배만큼 많아졌을까? 도대체 1+1=2라는 것이 맞는 경우가 어디에 있을까? 오직 한 경우만 있다.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 그 세상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
이만큼 내가 노력했으니 이 정도 결과는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간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2라는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 우리는 그가 1만큼의 노력을 두 번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것이다. 작은 1이 있고, 기다란 1이 있을 수 있다. 땀으로 뒤범벅된 1이 있고 미안하고 슬픈 그래서 조심스러운 1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1+1이 2가 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완전히 똑같은 1만큼의 삶의 순간은 없기 때문이다. 삶은 2라는 결과가 아니라 1에 1을 더하려는 부단한 마음이다. 그것이 2가 되든 다시 1이 되든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런 삶을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마음을 한 번 더 더해가는 것이 삶이다.
숫자는 삶이 아니라고 지적할 것이다. 도대체 1+1=2라는 것과 삶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왜 섞느냐고 물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런 비난을 받고 싶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보기에 숫자는 나이라는 모습으로 돈이라는 모습으로 시간이라는, 노력의 정도라는 모습으로, 순서와 순위, 높은 것과 낮은 것, 대단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 잘 사는 삶과 못 사는 삶이라는 모습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식민, 식민화. 식민화의 목표는 사람들이 식민화되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만드는 것이다. 1+1=2라는 것 속에서 안정을 느끼는 만큼 우리는 그렇게 아주 잘 식민화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