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가볍게 무시할 줄 아는 묵직한 삶
말 그대로 생각이 봄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던 시기(사춘기, 思春期), 한 영화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 말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인 영화였다. 그런데 지금도 이상한 그 장면은, 한 천사가 도서관에서 독서 중인 사람 곁에서 미소를 짓는 장면이었다. 천사가 마치 자신이 찾던 사람을 찾게 되어 행복해하는 모습 같았는데, 문제는 ‘천사’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천사’는 착한 존재이고 착한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사람들이 착한 행동을 하도록 돕는다거나. 그런데 세상 밖에서 생산적인 활동도 하지 않고 커다란 도서관에서 그저 좋아하는 책에 빠져있는 사람을 사랑스럽게 지켜주고 있었다. 영화는 마치 책에 빠져 있는 사람이 천사와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아 나는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는 사람이 천사라는 생각은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영화 이후로도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천사를 불순하게 상상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정리가 안된 채로 그 장면을 빨리 기억에서 덮어 버렸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동네 도서관에 나와 있다. 집이 너무 덥다 보니 춥기까지 한 도서관 에어컨을 찾아온 것이다. 글을 위에서처럼 저렇게 시작한 이유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한 노인 때문이다. 정말로 나는 지금 같은 책상에 앉아 저 노인을 보며 글을 쓰고 있다. 노인의 앞에는 에센스 독한 사전과 모델 독한 사전이 널려 있다. 모델 독한 사전까지 쓰는 것을 보니 아마도 대학 시절 독일어 전공자가 아닌가 싶다. 알 수 없는 누런색 독일어 원서를 앞에 두고 종이사전을 넘기고 찾은 내용을 작은 노란 메모지에 적고 있다. 종이사전을 찾는 옛날 사람들이 가끔 그렇듯이 자기도 모르게 단어소리를 작게 입으로 내면서 말이다. 교수라고 하기에도 나이가 너무 많다. 자기 핸드폰 진동소리도 느끼지 못할 만큼 연로한 노인이 논문을 발표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창 대학원생처럼 원서 읽기에 빠져 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일까. 저 나이에 머리를 긁어가며 독일어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 속도로는 하루 종일 앉아서 한쪽 읽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기억을 더듬어 다시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다. 생각해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천사가 한 명 더 있었다. 얼마 전 같은 시집을 중고책 사이트에서 찾으려다 포기한 적이 있는데, 장 꼭또의 시였다. 시집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디자인에 쓰지 않는 칙칙한 갈색 표지였던 것 같다. 거기에도 이상한 천사가 한 명 있었다. 어렵게 찾아낸 내 기억에 의하면 그 천사는 이런 시구 속에 등장했다. ‘나는 중력이 낳은 천사이다’ 사춘기를 최대한 길게 즐겼던 나는 고교 자습시간에 그 시구를 이리저리 생각해 보며 나만의 방식으로 조용한 반항을 했다. 물론 그 뜻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세하게 느껴질 뿐 글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천사는 나를 착한 어린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착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랬던 나에게 배운 적이 없는 생각들이 봄꽃처럼 한꺼번에 피어났다. 착한 것과 관련이 없는 천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착한 것과 관련이 없어도 착하지 않아도 천사처럼 순수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노인은 아까 짐을 챙겨 떠났다. 나는 생각을 이어가기 위해 노인이 앉았던 책상 반대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미를 가볍게 무시할 줄 아는 묵직한 삶’이 이제 나를 천사로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다 큰 어른이 세상을 뒤로 하고 무책임하게 책에 빠져 있는 모습에서 나는 그런 천사를 본다. 악을 저지를 수 없는 ‘중력의 세상’ 속에서 마음껏 곡예를 하고 싶다. 착할 필요도 없고 착할 수도 없는 천사의 승리.